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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교수 전주 강연 지상중계②

마루키 이리·도시 화가 부부의 ‘증언’과 ‘성찰’


... 문수현 (2017-02-22 13:51:43)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67)의 20일 전주 강연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차별과 배제의 땅 후쿠시마’의 내용을 세 차례로 나눠 싣는다. [편집자]

마루키 이리·도시 화가 부부

부군인 마루키 이리 씨의 고향이 바로 히로시마에요. 도쿄에 있다가 자신의 고향에 원자폭탄이라는 게 떨어졌다, 한번 가야한다 해서 3~4일인가 지나서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지역에 들어갔지요. 거기서 말 그대로 지옥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든 그걸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그걸 세계에 알려야 한다, 이렇게 명심하고 부부가 힘을 합쳐서 일본화의 기법과 양화 기법을 합쳐서 ‘원폭도’라는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지금 보신 건 원폭도 중 ‘지옥도’라는 그림이에요. 다음으로, 이것은 원폭도 중 제1도인 ‘유령’이라는 그림이에요. 이어서 보시는 건 ‘풀’이라는 시리즈 중 하나이고 역시 원폭의 참혹함을 그린 것이에요. 다음 그림은 ‘무지개’입니다.

이 화가 부부가 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 건 1950년대 중반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1945~1952년 7년간 일본을 점령하고 정보를 통제하던 시절이죠. 따라서 원폭을 비판하는 소설이나 그림 등을 전부 통제했어요. 그려도 전시를 못했고요. [하지만] 이분들은 “그려야 한다.” 해서 그렸고 1950년대 지나서 전시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원폭 직접피해자들은 많이 비판을 했어요. “아직까지 나약하다. 이런 정도가 아니다. 그림 속 상황이 우리가 직접 경험한 상황을 정직하게 반영하지 않았다. 현장은 더 말도 못하는 지옥이었다.” 이런 비판이었죠. 다른 한편의 비판은 보수파, 우파, 무관심파의 것입니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해서 무슨 도움이 되냐. 우린 미국을 따라 나라를 부흥할 수밖에 없는데.” 같은 비판이에요. 이렇게 양쪽에서 비판받으면서 고민 고민하면서 제작활동을 계속하셨어요. 그리고 세계적으로 봐도 아주 의미가 있는 그림인데도 일본에서는 공적인 단체가 일체 지원해주지 않아요. 일본에도 물론 군립, 도립, 시립 여러 미술관들이 있고, 대학미술관도 있는데 한 푼도 안 내요. 단 한 작품만 오키나와 사키노미술관이라는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마루키 부부가 자비로 마루키미술관을 일본 도쿄 사이타마 현에 세우고 지금까지 운영해왔어요. 부부가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후계자가 지키고 있는데 어려워요.

다른 그림을 보겠습니다. 그림 속 아랫부분에 있는 시체는 미국 군인이에요. 포로로 히로시마에 있던 미국 군인도 희생당했어요. 자신들 나라의 원폭 때문에. 마루키가 그걸 그리고 나서, 과연 원폭이라는 게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피해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인간 전체에 대한 죄인지 이런 걸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히로시마 연작 중 14화 까마귀(Crows) | からす (1972), 1.8mx7.2m. 출처=Imagination Without Borders.

다음 그림은 ‘까마귀’입니다. 여러분은 환경운동을 하시니까 이시무레 미치코를 아시죠? 구마모토 현에 사는 여성시인인데 미나마타병(공해병)을 주제로 훌륭한 작품을 썼어요. 미나마타병 희생자,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자료집으로 만든 것이에요. 이시무레 미치코가 자신의 시에, 나가사키에서 원폭 던져진 직후에 까마귀가 많이 날아오고 사체의 눈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체가 거의 조선인이었다고 말해요. 왜냐면 첫째, 조선인은 우선 외국인이고 식민지 지배받은 ‘2등 국민’이어서 아무도 우선적으로 도와주질 않고 그냥 방치해요. 둘째, 일본인은 그래도 친척이나 가족이나 친구나 동네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어제 그저께 조선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어서 아는 사람이 없어요. 말도 소통이 안돼요. 그리고 일본인들이 간호병들조차도 ‘너희는 조선 놈인가.’ 해서 그냥 방치해요. 그런 얘기를 미치코씨가 시로 썼어요. 마루키 부부가 이 시를 읽고 ‘아! 우리는 원폭이야기를 자기중심적으로 하면 안 된다. 어떻게든 까마귀를 주제로 그려야 한다.’고 느꼈고 이 그림을 그렸어요. ‘까마귀’를 보면 치마저고리가 그려져 있죠? 조선인의 한 많은 억울한 영혼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신의 고향 쪽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상상을 그린 거예요.

이들은 히로시마를 어떻게 성찰했는가

하야시 쿄우코라는 여성소설가도 있어요. 이 사람은 나가사키 원폭피해자인데, 10여 년 전에 저와 대담도 했어요. 자신도 원폭피해자니까 평생을 바쳐 핵반대 운동을 하고 계신데요, 나가사키에서 원폭 던져진 그날 밤에 “아이고- 아이고-” 하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고 해요.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 동포들이 거기서 억울하게 죽었을까요. 그러니까 원폭이나 원전사고나 쓰나미 같은 일 앞에서는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럴 때도 차별이 있어요. 예로, 타이나닉호 침몰하는 영화가 있죠? 그걸 보고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면 부자도 가난한자도 백인도 흑인도 모두 죽는다. 그런 일 앞에선 우리 모두가 평등이다”라고 아주 속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영화만이라도 가만히 신중히 보면요, 밑엣 방의 가난한 자는 탈출할 수가 없어요. 위에 있는 부유한 자가 우선 피난해요. 그런 장면까지 영화에 나오는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얘길 해요. 특히나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그런 얘길 해요.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백인이나 일본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증오하란 얘기가 아닙니다. 그 얘기가 아니라, 마루키씨처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떤 구도에서인지 어떤 토양에서인지 알아야 그걸 해결도 하고 연대도 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얘길 하면 “서경식씨 같은 얘기가 화해에 장해가 된다.” “한일 민족 서로가 화해해야 하는데 너는 그걸 방해하고 있다.”든지, “앞으로 양국이 손잡고 서로가 구명해야 하는데 재일조선인들이 너무나 원한이 세고 안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일본에도, 국내 여러분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역사를 보고 사건을 볼 때 너무 좁은 시야 아닌가요? 오히려 마루키씨는 훌륭하다고 봅니다.


▲Nanking Massacre | 南京大虐殺の図 (1975). 출처=Imagination Without Borders.

지금 보는 것은 난징대학살 그림이에요. 마루키씨가 물론 난징을 직접 겪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폭도를 60년대인가 미국에서 전시를 했어요. 그때 미국에 있는 중국계 미국인이 와서 “당신은 일본인이 원폭피해를 받았다는 얘기만 하는데 그래도 되느냐?”고 했대요. 그때 깊이 그 문제를 성찰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마루키씨는 ‘그렇다!’ 해서 난징대학살 그림을 그리셨어요. 그런데 60년대만 해도 일본이 난징에서 대학살을 벌였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어요. 물론 희생자 수가 30만 명이다 20만 명이다 하는 논란은 있었죠. 그러나 사건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일본에서 이 그림을 전시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돼요. 요코하마 시에서 교과서에 부독본으로 관동대지진하고 난징대학살에 대해 서술을 했는데 우익들의 압력으로 표현을 줄이고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바뀌었어요. 그런 일들이 지난 20년 동안 계속돼 왔는데 아베 신조 정권이 돼서 더 심해졌어요. 극단적으로 심해졌어요. 그런데 마루키씨는 난징, 아우슈비츠,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피해자 등 보편적 시야로 이 사건[그들이 겪은 히로시마]을 성찰하려 시도했던 것이에요.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마루키씨 부부가 살고 계셨고 미술관이 있는 지역이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이에요. 도쿄에서 북방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죠. 그곳에 땅을 사고 미술관을 세웠어요. 그곳 주차장에 가면 ‘통한비’라는 게 있어요. 마루키씨가 자신의 땅에 자신의 글씨로 세웠어요. 거기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이 벌어진 현장이거든요. 증언, 성찰, 반성, 참회의 뜻으로 미술관 주차장에 자비로 자기 작품으로 비를 세운 것이죠. 주변 주민들은 싫어해요. 새삼스럽게 얘기 안했으면 하는 역사인 거죠. 어쨌든 마루키씨 부부처럼 살아온 일본인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쉽게도 극단적인 소수이지만요.

오키나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오키나와 사키마미술관을 소개하죠. 사키마라는 오키나와 사람이 운영합니다. 철거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군의 후텐마 공군기지 바로 옆에 있어요. 사키마씨는 원래 미군기지로 수용당한 땅의 지주였는데 보상금으로 미술관을 세웠어요. 엄청나게 큰 벽화인 마루키 부부의 오키나와 전도(戰圖)를 전시하고 있어요. 기회 있으면 꼭 보셔야 합니다. 물론 예외가 있지만 전쟁그림이라는 게 거의가 국가의 지원을 받고 국가적인 전쟁서사를 그리죠? 화가들이. 우리 군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나, 어느 장군들이 얼마나 훌륭했었나 하는.

오키나와인들은 우리보다 앞선 대일본제국 식민지의 신민들이에요. 전쟁말기에 오키나와에서 지상전투가 벌어졌을 때 오키나와인들이 희생당했어요. 물론 미군한테 희생당했는데 일본군한테서도 희생당했어요. 왜냐면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인들이 볼 때는 끝까지 믿을 수가 없는 2등 국민이다,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그런 것이었어요. 식민지시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역사를 공부하면 나와요. 식민지시절에 조선인은 1944년까지는 징병 대상이 아니었어요. 징병을 안 받았어요. 물론 지원해서 군에 간 조선인도 있었지만요. 일본인은 병역대상이었고, 조선인은 아니었어요. 이것은 배려가 아니고 “조선 놈들은 우리의 지배에 대해서 마음으로 환영하고 있는지 어떤지 믿을 수 없다. 총 들게 하고 군사훈련 시키면 언제 우리에게 이 총으로 반항할지 모른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때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인 조선군에게 도쿄의 일본군본부가 “언제 조선인을 징병할 수 있을지.”를 물으니 “앞으로 30년 정도는 걸릴 거다. 지금 황민화교육을 받고 있는 세대의 다음 세대가 돼야 그런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대답을 공식적으로 했을 정도에요. 그래도 전쟁이 길어지니까 44년에 징병제를 실행합니다. 이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이 그래요. 일본 국가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어야 훌륭한 일본인인데 조선인은 그거 할 수 있나, 안 하겠지, 참된 일본인 아니다. 그런 차별·억압을 많이 받아왔죠.

윤동주 시인이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당했는데, 친구들끼리 교토의 하숙집에서 “조선어학회가 탄압받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일본이 우리에게 병역제를 적용할 거다. 이것이 우리에겐 오히려 호기다. 우리가 독립운동 할 때 몇 년 잘 참고 이 고비를 살리자.” 이런 얘길 했다. 이걸 누군가 밀고 했다는 것이죠. 결국 윤동주는 후쿠오카에서 억울하게 옥사하죠.

그런데, 사키마 같은 오키나와인도 비슷한 처지를 겪어왔어요. 오키나와인들도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잘 소통이 안 돼요. 일본 본토인들에게는 듣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간첩일 수도 있다, 군사기밀을 미군에게 통보할 수도 있다.’ 그런 구실로 죽여요 오키나와인들을. 폭격을 받고 있을 때 참호에 자신들은 숨어있고 오키나와인들은 밖으로 나가게 했어요. 그리고 자결(자기 스스로 자살 또는 자신의 아이나 부인 등을 죽이는 행위)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나도 훌륭한 일본인이다.”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자신의 가족을 죽여요. ‘아기가 울면 미군한테 들킨다.’ 이런 시선을 받게 되면 아기를 죽여요. 그런, 자결이라는 불쌍한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어요. 그것이 오키나와전에 있어서 자결이라는 것입니다. 마루키 부부가 그린 오키나와 전투도가 바로 그거예요 ‘자결도’. 일본 국민의 처지에서 그린 게 아니라 오키나와인들이 전쟁 때 식민지 신민으로 얼마나 억울한 희생을 당했을까를 그린 거예요. 그 그림이 지금 오키나와에 있는 사키마미술관에 전시가 돼있습니다. 이 사키마가 잘 버티고 미군기지에도 항거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 그림을 한 번 봐줬으면 합니다.

왜 이런 얘길 하느냐? 오키나와는 제일 먼저 식민지화된 땅이에요. 독립국가이다가 중국 명·청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슬아슬하게 독립을 지켜왔는데, 명치시대 들어가면서 일본의 식민지가 돼요. 그리고 북해도, 대만, 조선, 만주 순으로 일본이 관장해온 것이죠. 우리뿐만 아니라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어요. 동아시아라는 게 아시아의 동쪽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받아온 땅이라고 저는 얘기해왔어요. 그럼 누구하고 연대하고 손을 잡고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자명하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