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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뿔이 녹았다

[홍순천의 ‘땅 다지기’(32)]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7-07-26 23: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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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폭우가 쏟아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내리 꽂히는 변덕스런 시기다. 새벽에 고기를 잡으러 가는 어부처럼 한낮의 햇살을 피해 집안에만 매복해있는 나날이다. 포도나무 그늘에서 몸피를 키우는 깻망아지도 몸을 꽁꽁 숨겨 보이지 않는다. 덥다 더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이다.

대서(大暑)는 일 년 가운데 가장 더운 때다. 24절기의 딱 중간이다. 밤에도 잠 못 이루고 마당가에 앉아 모깃불을 피우고 부채로 모기를 쫓아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나는 시절이다. 비가 오지 않는 밤이면 마당에 자리를 펴고 누워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에 어린 시절의 작은 돛단배를 띄운다. 7월 7석, 까치와 까마귀가 놓아준 오작교(烏鵲橋)를 건너 만날 견우와 직녀를 그리며 여름밤은 깊어갔다.

덥고 눅눅하다가 내리 꽂히는 햇살은 가히 살인적이다. 대서에는 염소 뿔이 녹는다고 했다. 더위를 이기기 위한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명으로도 남아있는 서빙고(西氷庫)는 동빙고(東氷庫), 내빙고(內氷庫)와 더불어 얼음을 저장했던 곳이다. 서빙고는 궁중, 문무백관 및 환자나 죄수들에게 나누어줄 얼음을 저장했던 곳으로 규모가 제일 컸다. 음력 12월 즈음 한강의 얼음이 4치두께로 얼면 이를 잘라 저장했다. 이듬해 더위가 시작되면 얼음을 꺼내 사용했다. 자연을 이용한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현대에 들어 인간의 지혜가 자연을 이기는 듯 했지만 착각이었다. 인위적인 조작과 과도한 에너지 소비가 순간적으로 인류를 편하게 하는 듯 했지만 그 여파는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적응 불가능한 기후가 인류에게 호통치기 시작했다.

대서 전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모자를 썼지만 더위를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땀이 비 오듯 떨어지고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급기야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며 현기증이 났다. 울렁이는 속에서는 마신 물이 끝없이 역류했다. 일을 포기하고 집에 왔지만 휘둘리는 몸에 흐르는 땀은 멈추지 않고 구토가 계속되었다. 결국 검붉은 코피가 한 사발 터졌다. 검은 머리 위로 하얗게 내려와 쌓이는 세월처럼, 문득 혼자 있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홀로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사람들은 안간힘을 쓴다. 정치에, 종교에 기대고 친목회를 만들며 '우리는 하나'라고 늘 외치지만 돌아갈 곳 없는 떠돌이라는 것만 깨닫곤 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무리수를 두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갈 길을 제대로 가겠다는 사람들에게 딴지 걸고 치기어린 자기만족을 훈장처럼 들어 올리는 '레밍'들이, 그런 의미에서는 한편 안쓰럽다. 쓰러지더라도 햇살 아래 당당히 맞서는 솔직함이 오히려 힘이 있다. 대서에는 염소 뿔도 녹는다. 어설픈 치기로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는 말아야겠다.

납덩이 같은 구름이 하늘을 짓누르고 찌는 더위에 흐르는 땀을 감당하자면 몸이 녹는다. 이럴 때는 시원해 보이는 달나라로 도망갈 수도 없고, 몸을 추스르는 음식으로 더위를 이겨내야 한다. 옛날부터 복지경에는 기름진 음식으로 지친 몸을 달랬다. 용(龍) 대신 자라를, 봉(鳳)을 대신해 오골계를 함께 넣어 끓인 용봉탕은 대표적인 여름 보양식이다. 검정깨로 만든 '임자수탕', 보신탕, 삼계탕은 옛 어른들이 즐겨먹던 보양식이다. 이참에 용봉탕이라도 한 그릇 몸에 헌납해야 이글거리는 여름을 건너갈 수 있을 듯하다.

가뭄에는 기러기 피를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다가도 이렇게 후텁지근한 열대야에는 서늘한 가을바람이 기다려진다. 끝없이 던져진 생의 숙제를 해결하다보면 어느새 귀밑머리 희끗하게 바람에 날리는 벼랑 끝에 홀로 서있는 순간을 맞이하리라. 날이 제아무리 뜨거워도, 더 뜨겁게 살아볼 일이다. 염소 뿔은 녹아도 다시 돋아 오른다. 입추(立秋)가 내일모레다.


▲원추리 꽃은 더워도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낸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