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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해, 그리움

[홍순천의 ‘땅 다지기’(44)]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8-01-10 19: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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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동지가 지났지만 산골의 밤은 깊다. 거울에 비친 별처럼 땅에서 반짝이는 서릿발이 맨발을 쑤신다. 부지런한 새들도 마당을 찾지 않는 새벽, 바람이 차다.

새 해를 맞이하며 수시로 전화기를 뒤진다. 거짓말처럼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편하게 말 걸어 푸념할 친구를 찾기 어렵다. 마음만 먹으면 안부를 물어보고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침 바른 우표를 떨어질까 애 닳으며 꾹꾹 눌러 우체통에 고이 넣은 편지가 답장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그리움이 없다. 그리움이 사라져 외롭다. 편지가 답장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리던 머릿속그림도 손 빠르고 셈 빠른 세상에선 감히 허용되지 않는 낭만이다. 마지막 절기가 서슬 퍼런 칼날처럼 세상을 얼리는 시절, 대한(大寒) 지나면 봄이 오지만 아직 세상의 봄은 오지 않았다는 푸념이 마음에 달라붙는다.

소가 얼어 죽는다는 소한 무렵이다. '대한'이 '소한'네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추위가 절정이다. 균형을 이루려는 마고할미의 손톱이 온 세상을 헤집고 다스리는 중인가 보다. 바다를 일구어 산을 만들고 바위를 두드려 모래로 만드는 자연의 힘이야말로 위대한 절대 권력이다. 한순간의 이익에 목숨을 거는 인류에게 경고를 보내는 자연은 요즘 몹시 분주하다. 극한 추위와 겨울 태풍, 감당할 수 없는 폭우를 보내느라 바쁘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유대민족을 구해내기 위해 보낸 하늘의 열 가지 재앙과 비슷하다.

성경 속의 유월절(逾越節)은 마지막 재앙을 피하기 위해 문설주에 양 피를 바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희생도 준비도 없이 새 세상을 맞이할 수 없다는 상징적인 의식이다. 양고기에 곁들여 누룩을 넣지 않은 '파스카'를 먹는 그들의 축제는 아직도 중요한 통과의례다.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지 않은 우리에게도 지나칠 수 없는 통과의례가 남아있다. 절대왕정의 권세가 지배하는 물질과 권력의 기득권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의식의 기득권'을 해체하는 일이다. 중앙권력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제대로 된 자율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눈치만 보며 '그까이꺼 뭐 대충' 일하는 풍조가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와중에 피를 빨리는 것은 끈도 권력도 없는 소시민들이다.

피 같은 세금을 중앙권력의 못된 손아귀가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최근 소식에 또 다시 가슴이 무너진다. 피를 보지 않으면 '가나안'에 도착할 수 없다는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유효한 듯하다. 개피 보지 않으려면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지만 오만한 '기득권'은 여전히 헛소리 중이다. 젊은이들은 여전히 불안정한 저임금에 삶을 포기하고, 앞을 볼 수 없는 세상에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데 재산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그들의 파렴치에 피가 거꾸로 흐른다. 피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새 해가 떴지만 햇살은 아직 냉정하다. 작두콩 차를 우려 잠시 추위를 물리친다. 꽁꽁 싸맨 벌통을 살피고 냉큼 들어선 집안 온기가 고맙다. 동지 후 구구(81)일이 지나면 화들짝 피어나실 매화꽃 위로 분주하게 날개를 펼칠 벌처럼, 분주하고 향기로운 봄이 그립다. 고이 접은 편지를 받으실 님의 답장은 더디지만 향기 분분한 매화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리움을 키우는 것에 죄를 묻지는 않으리라. 털어내려 애쓸수록 그리움은 부피가 커져 괴롭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삭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눈발처럼 향기 날리는 매화를 기다리며 겨울을 버틴다.

농사일이 한가한 겨울에도 산골마을은 분주하다. 돼지 한 마리 잡아 막걸리를 나누자는 방송에 화들짝 귀가 열린다. 고기 굽는 연기가 마을에 가득하고 술에 취해 떠들썩한 호기가 한기를 누르겠다. 외로움이 가끔 반갑기도 하다.


▲고드름이 그리움처럼 자란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