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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19 08:14:30

‘탈(脫)코르셋’과 ‘여성 소비 총파업’ : 여성의 주체되기 선언

[전북교육신문칼럼 ‘시선’]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 페미의학수다 ‘언니들의 병원놀이’ 기획자)


... 편집부 (2018-08-06 0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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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슬기)

연일 폭염이다. 온열병 환자들이 급증하고, 일상의 영위가 어려울 정도의 더위. 가히 재난이라 규정될 만하다. 그러나 이처럼 무섭도록 혹독한 더위에도, 여성들이 쉬이 벗어던질 수 없는 ‘코르셋’이 있다. 여성들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의무이자 본질적인 ‘여성성’인 양 인식되기까지 하는 소위 ‘꾸밈노동’이다.

‘꾸밈노동’을 요구받는 여성에게 있어 여름은 분명 한층 가혹한 계절이다. 무엇보다 먼저, 몸에 달라붙는 모든 것이 극도의 불쾌감을 유발하는 날씨에도 가슴과 어깨를 답답하게 짓누르는 브래지어를 입어야 한다. 얇은 겉옷 때문에 그 브래지어가 비칠까 우려되어 또 캐미솔(여성용 런닝)을 입는다. 남성들이 얇은 겉옷 하나를 입고 그마저도 훌렁 벗어던질 자유를 누릴 때, 여성들은 폭염 속에 세 겹의 옷을 입는 셈이다. 여성의 기본 의무이자 ‘예의’라고까지 표현되는 화장도 마찬가지이다. 금방 샤워를 하고 나와도 땀이 흐르는 더위 속에, 피부에 겹겹이 화장품을 바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결코 쾌적할 리 없다. 화장을 한 이후에도 이것이 땀에 지워지지 않도록 종일 유지해야 하는 강박감 속에 물 또한 멀리해야 한다. 아무리 덥고 땀이 나도 시원하게 세수 한 번 할 수 없다. 실오라기 하나만 달라붙어도 더위가 느껴지는 날씨에, 목과 어깨를 덮는 긴 머리는 털목도리를 한 듯 더위를 증폭시킨다. 헤어스타일링을 위한 드라이어와 고데기 또한 열을 내는 기구이다. 이쯤이면 여성에게 요구되는 ‘꾸밈노동’이 왜 ‘코르셋’으로 대표되는지 이해될 만하다.

‘코르셋’은 여성의 상반신을 꽉 죄는 보정속옷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단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몸을 졸라매는 여성만의 옷. 여성 자신을 위함이 아닌, 여성을 보는 ‘시선’을 위한 장치이다. ‘여성성’이라는 사회적 정의가 여성을 외모적 잣대로 평가하며 끊임없이 여성을 옥죄는 것을 비유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매일 출근길에 보게 되는 한 광고 간판에는 <죽을 때까지 예뻐야 여자다>라고 씌어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성’이 뜻하는 바가 극명하게 드러난 광고다. 택시에 그려진 어느 성형외과 광고에는 <세상이 나에게 친절해졌다>고 적혀 있다. 서글플 만큼 노골적인 문구다. 이처럼 여성의 외모가 사회적 인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재난에 가까운 폭염 속에서도 계속되는 ‘꾸밈노동’을 “여자는 원래 아름답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이를 개인적인 선택이나 욕망의 차원으로 보는 것 역시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사회적 ‘여성성’이 개인에게 학습된 결과이며, 결국 사회적 인정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개인의 영역에서 지속되고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꾸밈노동’은 단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화장법을 배우기 위해 동영상 채널을 구독하며 공부와 훈련을 거듭하고 심지어 학원 수강까지 해야 한다. 휴식을 취하거나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쪼개어 매일 외출 준비에 1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혹독한 운동과 극한에 가까운 식이요법은 건강을 다소 해치더라도 보여지는 몸을 위해 필요하다. 발뒤꿈치 각질이나 겨드랑이털, 다리털 관리는 이제 ‘예의’와 ‘청결’의 차원이 되었다. 관리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관리를 안하면 수치스럽게 생각되는 범주인 것이다. (이것이 ‘예의’와 ‘청결’의 문제라면 왜 여성의 신체에만 요구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우스갯소리거나 메갈로 치부된다.) 외모에 대한 기준은 전신을 스스로 검열하여 어떻게든 부족한 곳을 찾아내게끔 만든다. 손가락 발가락까지에 난 털에 이어 무릎과 팔꿈치 색깔, 음부나 유두의 착색까지. 병원에 내원한 환자들이 “제 소음순 모양이 이상한가요?”라고 묻는 경우는 산부인과 의사인 내게도 이제 일상적이 되었다. ‘여성성’에 대한 기준은 이처럼 외모잣대에 집약되어 있고, 끊임없이 세부적인 기준이 제시되며 갱신된다. 스스로를 끝없이 검열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며, 어떤 여성도 결코 ‘완벽’할 수 없는 늪과 같다.

이러한 기준은 모두 ‘인간’이 아닌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것이다. 여성은 반드시 ‘예뻐야만 한다’는 당위적 대전제 하에.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보이고 평가될 것인가가 그 여성의 가치를 만든다는 사회적 동의 하에. 누구라도 그것을 평가해도 좋으며, 그 줄에서 벗어나면 낙인을 찍는 암묵적 합의 하에. 평가점수가 낮으면 ‘가치 없는’ 존재가 되고, 게으르고 의지가 없는 실패자거나, 혹은 마녀(최근 용어로는 메갈이나 워마드. 일부 남초 사이트에서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일컬어 ‘뚱뚱해서 남자에게 인기가 없는 여성들이 복수심으로 페미니즘을 한다’는 비하의 뜻을 담은 ‘쿵쾅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가 된다. 평가점수가 높으면 경쟁자가 많은 ‘성적 대상’이 되거나, 그 경쟁에서 패배한 남성에게는 된장녀가 되거나,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의 꾸밈노동 자체가 조롱거리가 된다. 평가가 어느 쪽이든 답은 정해져 있다. ‘여성’이 문제인 것이다.

한편 이렇듯 여성의 몸에 대한 놀랍도록 세밀한 기준들이 각각 분야의 산업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계절마다 해마다 유행이 달라지는 립스틱 색깔부터, 화장법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화장용품, 온갖 헤어스타일링 기구, 보정속옷, 네일아트 용품, 제모용품, 다이어트 식품 등 꾸밈노동을 위해서는 온갖 ‘소비’가 필수적이다. 대부분 이러한 여성용품 마케팅은 실체도 없는 ‘정상’의 기준을 제시하며 여성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자극한다. 유행에 뒤처질까봐, 나이 들어 보일까봐, 뚱뚱해 보일까봐, 더러워 보일까봐, 경험이 많아 보일까봐. 이 모든 두려움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스러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개인에게 깊고 내밀하게 학습되어 있다. 그래서 우연히 보게 된 잡지에서 유두 미백 크림 광고를 보는 순간 ‘뭐 이런 것까지’ 하던 마음이 ‘혹시 나도 착색되어 있나?’하는 두려움으로 바뀌고, 진료를 위해 찾은 산부인과 병원에서 소음순 성형 광고배너를 보는 순간 ‘혹시 나도 수술이 필요한가?’하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듯 강요된 여성성과 이에 대한 여성의 두려움을 기반으로 발달한 산업 속에 훨씬 많은 소비를 요구받으면서도, 과연 소비자로서의 여성들은 소비의 ‘주체’인가. 지난 6월 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른바 ‘Pink Tax(핑크 택스)’에 관한 청원글이 올라왔다. ‘핑크 택스’란 여성용 제품이 남성용보다 더 비싸거나 질이 낮은 현상을 말하는데, 이는 실제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이다. 미용실에 가도 커트와 펌, 염색 등의 서비스에 여성이 더 비싼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으며, 화장품 역시 같은 기초 제품이라도 여성용이 남성용보다 비싸다. 최근에는 여성용 제품이 단지 비싼 가격을 넘어 품질마저 떨어진다는 혐의가 짙게 일고 있으며, 이는 SNS를 통해 여성들의 남성팬티 입기 바람으로 확산되고 있다. 모양만 신경쓰는 여성팬티는 비싸기만 할 뿐 오히려 질이 떨어지며, 남성팬티를 입었더니 너무 편하고 좋았을 뿐더러 아토피나 음부 질환까지 완화되었다는 여성들의 경험글이 SNS를 통해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다른 제품군에서도 남성용 면도기가 비싼 여성용보다 훨씬 성능이 좋다는 경험담, 남성화장품의 가성비가 더 낫다는 경험담 등이 잇따르고 있다. 실제 ‘핑크 택스’ 논란이 일찍 시작된 국가들에서는 제품 조사를 통해 기능 면에서 차이가 없음에도 단지 여성용이라는 이유로 더 비싼 가격이 책정되어 있는 제품들을 확인한 바 있다.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성에 따른 가격차별금지법을 제정했으며, 프랑스·영국·호주 등에서도 관련 청원이 제기되거나 시위가 이어졌다. 여성에게 소비를 강요하는 사회, 훨씬 많이 소비하면서도 소비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의 지위가 새삼 확인되는 지점이 아닐까. 또한 이렇듯 소비자로서의 여성이 지탱하고 있는 산업에서조차 여성이 노동주체가 될 수 없으며, 더 많이 소비하면서도 성별 임금격차와 나쁜 일자리에 떠밀려있는 상황 역시 합리적인 분노의 지점이라 하겠다.

최근 이처럼 ‘여성스러움’에 대한 사회적 정의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거세다. ‘탈(脫)코르셋’이라 불리는 이러한 흐름은, 단지 외모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닌, 행동과 생활양식 전반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어 왔던 가치들을 벗어나 ‘코르셋’을 벗어 던지고 여성의 주체성과 자유를 찾기 위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도 소비의 중요한 주체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취지로 시작된 ‘여성 소비 총파업’이 7월부터 매달 첫 일요일에 실시되고 있다. 8월 5일 일요일 두 번째로 진행된 여성 소비자 총파업은 “노동의 주체는 소비의 주체다”, “우리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는 슬로건으로, 소비 총파업·소비 불끄기·38 적금 인증의 세 가지 참여방법을 제시한다. 한편 ‘탈코르셋’이 여성들에게 또 다른 강요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나, 하루 동안의 소비 총파업이 무슨 효과가 있느냐는 무용론 등 논란 역시 뜨겁다. 그러나 여성이 자신에게 강요된 틀을 깨고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선언 그 자체로서, 여성들의 존재와 영향력을 사회에 일깨우는 또 하나의 외침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