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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폭우 사이에서

[홍순천의 ‘땅 다지기’(60-최종회)]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8-08-07 11: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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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다. 가을이 시작되는 절기에도 한낮에는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재앙 수준이다. 올해는 어찌 참고 견뎌내겠지만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자연재해가 잦아질 지구촌에서 살아갈 아이들이 걱정이다. 동쪽 창이 어슴푸레 밝아져 마당에 나섰다. 새벽부터 날개를 펴고 날아다니는 벌통 앞에 쪼그려 앉아 부지런하고 기분 좋은 향기를 가슴에 들였다.

벌통 앞에는 대추벌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 꿀벌을 잡아먹는 대추벌이 날아오면 비상이 걸린다. 벌들이 소란스러워진다. 곧 집을 공격하는 적을 둘러싸고 공처럼 뭉쳐 대추벌을 쪄 죽이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다. 약자들의 반란이다. 많은 꿀벌이 희생되지만 집을 통째로 망가뜨리는 것보다는 현명한 선택이다. 그 일을 대신해주기로 했다. 파리채를 휘두르며 대추벌을 잡으면 저절로 아드레날린이 발생했다. 생명을 때려잡는 일은 정당하지 않지만 거세되지 않은 수컷의 본능에 남아있는 쾌감이겠다. 더위를 피해 마당에 나왔다가 새벽부터 일하는 애꿎은 대추벌 몇 마리의 목숨을 빼앗았다.

올여름엔 지구촌이 온통 화염에 싸여 전쟁을 치르지만 그 불균형한 기운이 한쪽에는 감당하지 못할 폭우를 쏟는다. 온당하고 오래된 균형을 깬 결과다.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씁쓸하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고기가 물에 빠져 죽고 새들이 하늘을 날지 않는 한낮 더위에 숨을 헐떡거리는, 인류는 조만간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이런 재앙을 경고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자기반성 없이 더 쉽게 많은 것을 누려온 우리 모두가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힘을 과시해야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남성적인 폭력과 인간중심의 세상에 길들여진 굴레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지난 2년간 우리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하다. 우리가 만든 폭염 속에 헐떡거리다가 폭우를 만나기도 하고, 폭력에 저항하는 다른 형태의 폭력을 취하기도 했지만 변화가 시작된 것만은 분명하다. 폭염과 폭우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오랫동안 권력을 공고히 쌓아놓은 기득권의 성벽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 같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총칼로 국민을 위협하고 불법 갈취해 쌓아둔 재산으로 권력을 만든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너무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폭염과 폭우 사이에서도 살아남을 지혜와 의지가 필요하다.

최근 노스님의 목숨 건 장기단식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더 착잡해진다. 세상의 한쪽 결이 달라진다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진 않는다. 오래전 가톨릭에서 ‘내 탓이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녔다. 그런데 스티커는 모두 차의 뒷 유리에 붙어서 꽁무니를 쫒아오는 운전자를 향해 있었다. ‘네 탓’이라는 책임 회피다. 그 스티커는 앞 유리에 붙이고 운전자가 읽도록 해야 마땅했다. 좋은 취지로 시작한 종교운동이 책임을 전가하고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변명의 수단이 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구할 것은 구하지만 내려놓을 것은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벌통 앞에 쪼그려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며 대추벌을 잡았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어떤 행위건 온전히 옳다고 강변할 수는 없다. 지나치게 취하지 않고 가볍게 내려놓는 지혜를 언제쯤이나 익힐 수 있을까? 스스로 반성해 본다. 어스름 새벽 공기에 몸을 식히고 집으로 들어왔다. ‘폭염과 폭우’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짧은 시간에 생각이 복잡해진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고 그렇게 또 살아가지겠지.... 가을이 왔다.


▲파리채에 맞아 죽은 대추벌

※그동안 변변치 않은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의 원고를 정리하고 조만간 새로운 주제로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봉곡마을에서 홍순천 드립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