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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를 찾아서 (3부)

[동산바치의 花和人仁(6)] 김근오(꽃마실카페)


... 편집부 (2018-08-27 14: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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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근오)

동산바치의 “花 和 人 仁”
- 여섯 번째 이야기 : 잡초를 찾아서(3부)

기록적인 더위가 물러가고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뜨겁고 가문 날씨에서도 들판의 잡초들은 꿋꿋하게 여름을 나고 있군요.
밤에는 풀숲에서 벌레들의 합창이 가을을 물씬 느끼게 해 줍니다.
잡초를 찾아가는 세 번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잡초는 한자로 雜草, 영어로는 weed라고 쓰지요.
그러면 이 잡초의 뜻과 정의는 무엇일까요?
국어 사전적으로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라고 합니다.
미국 잡초학회에서는 ‘잡초란 원하지 않는 곳에 생기는 식물이다’라고 다소 과학적인(?) 정의를 한답니다.
반면, 미국의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잡초란,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지요.

위 정의 가운데 여러분의 생각에 근접한 것들이 있는지요?
이처럼 잡초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을 일명 잡초관이라 부른다면(雜草觀, Weed Ideology), 그런 잡초관은 과연 진실을 토대로 하고 있는가 궁금해집니다.
이제부터 그 궁금증을 풀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잡초는 왜 가꾸지 않는 곳에 저절로 자라나는 걸까요? 라는 문제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복원력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흙이라는 토양에는 식생이라고 하는 식물군이 덮이게 되는데, 이 식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변해 갑니다. 이를 식생의 천이라고 말하는데, 개척자 식물에서 출발하여 작은풀에서 키큰풀, 또 작은나무에서 키큰나무 순으로 점점 변하다가 마침내는 안정된 숲을 이루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극상을 이루었다라고도 합니다.
즉, 자연스럽게 극상림을 향해가는 흐름이 자연토양에는 존재하는데, 자연재해나 인위적 개발로 인해 생태계가 훼손되게 되면, 천이과정을 되풀이하려는 힘이 발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복원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자연의 복원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연에서는 훼손된 생태계 복원을 위해서 맨 먼저 잡초들을 내어 기르는데, 이들을 제거하고 경제작물로 대체하는 것이 인간의 농사법인 셈이지요.

둘째, 잡초와 인간은 과연 서로 원치 않는 불편해 하는 관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몇 가지 잡초의 사례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질경이
질경이는 차전자(車前子)라 불리는 한자명에서 알 수 있듯이 수레바퀴자국을 따라서 퍼져 있습니다, 어떻게 마구 짓밟히는 환경에서 더 잘 자라는 걸까요?
그 비밀은 질경이의 번식방법에 있습니다. 질경이 씨는 물에 젖으면 접착액을 내놓아 쉽게 붙어서 이동을 합니다. 결국 사람이나 동물에게 밟혀서 씨가 퍼지는 원리이지요.
따라서 수레가 다니는 길이 없다면 지금만큼 질경이는 널리 퍼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2) 애기땅빈대
애기땅빈대는 빈대처럼 지면에 자신의 잎을 딱 붙여서 옆으로 옆으로 자랍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보도블럭 틈새에 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이런 황막한 환경에 참 용케도 살아가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면에 붙어서 자라다 보니 벌이나 등에에게 꽃가루를 옮겨받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애기땅빈대는 다른 전략을 구사합니다. 꽃가루받이를 개미에게 맡기는 전법입니다. 개미가 꿀을 받으러 이 꽃 저 꽃을 누비는 사이에 꽃가루받이가 되는 것이지요.


<애기땅빈대>

3) 매화마름
우리나라 강화도에 멸종위기종 매화마름 군락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매화마름의 생태가 참 특이합니다. 일반적인 자연환경이 아니라 논이라고 하는 인위적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래는 자연적 환경에서 발생하고 서식하였겠으나, 논이라는 환경이 자기네들의 생존환경에 더 적합하였는지, 논에서 줄곧 번식하여 살아왔나 봅니다.
그런데, 전통적 농법에서 기계식농법으로 생산방식이 바뀐 요즈음 매화마름이 자리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틈새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겨우 강화도의 논에서 군락지를 발견하였는데, 이를 내셔널 트러스트에서 보호구역으로 관리하고 있답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잡초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손길(또는 발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부터 끊임없이 제거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인간의 도움(?)이 없다면 존재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이 참 희한하고 재미있습니다.
이런 난해한 밀당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앞서 언급한 자연의 복원력을 다시 적용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잡초라는 식물군이 존재하는 공간은 황막히 벌거벗은 땅에 최초 자리잡는 작은풀숲, 그 이후의 키큰풀숲 아니면 작은키나무숲 정도입니다. 천이과정이 한참 지나서 키큰나무숲이 자리를 독차지 하게 되면 잡초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거의 없어집니다.
그런데, 농경과 도시개발 등 인간의 경제활동에 의해 계속해서 숲이 파괴되고, 헐벗은 땅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식생천이 과정이 반복되어 잡초들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지속해서 확보가 되게 됩니다.
따라서 헐벗은 곳을 메우려는 자연의 복원력이 작동할 빌미를 인간 스스로가 만드는 셈이므로, 잡초의 존립근거를 계속해서 제공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하겠지요.

이나가키 히데히로씨는 ‘흙이 있는 곳에 잡초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흙과 잡초를 분리할 수 없다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말로도 들리며,
흙은 늘 잡초를 비롯한 생명체를 키울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되살펴 본다면, 흙에 잡초가 자라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 흙을 경제적인 이용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곳에 자라나는 생명체들은 잡것들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연유산을 후손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후손들도 마땅히 누리고 사용해야 하니 소중히 쓰고 물려주자 라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 역시 임차인에 불과할 것이며, 궁극의 소유주는 누구일까 하는 물음이 듭니다.
이 흙이라는 대지를 소유한 이에 대해서, 종교를 가진 이라면 신이라고도 할 것이며, 혹은 대자연이라고 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잡초는 아직 그 가치를 모르는 풀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흙을 돌보기 위해 키우는 소중한 풀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게 됩니다.

권정생 님의 동화 ‘강아지똥’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인가 귀하게 쓰일꺼야..."

밭흙이 헤어지면서 강아지똥에게 하는 말입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잡초란 없다는 것을, 더 정확히는 잡초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편향의 산물이라는 것을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잡초에 관한 참고자료

1. 황대권, 야생초편지, 2002년, 도솔
힘들고 외로운 감옥살이에서 잡초를 벗삼아 수행하듯 써내려간 글들이 심금을 울립니다. 잡초라는 풀을 먹을거리로써, 또 생명력 강한 이 땅의 구성원으로서 재발견해나가는 과정들이 감동을 더합니다.

2. 강우근, 들꽃이야기, 2013년, 메이데이
이땅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마다않는 이주민 노동자들처럼, 귀화 잡초들이 그렇게 땅을 살리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작자는 즐겨 묘사합니다. 어쩌면 세계 각국의 잡초들은 비슷한 처지에서 묵묵히 자기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3. 이나가키 히데히로, 도시에서 잡초, 2014년, 디자인하우스
도시의 길 위에 늘 나고 자라는 잡초에 대해 친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건넵니다. 책을 읽고 나니, 무관심과 푸대접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자라는 도심의 잡초들을 한번쯤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4. 조셉 코케이너, 대지의 수호자 잡초, 2003, 우물이있는집
헐벗은 땅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은 잡초를 먼저 기르는 법이므로, 이들과의 공존이 인간의 농업에서도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땅속 영양분을 퍼올리는 기능, 흙을 스펀지 구조로 만들어 수분을 저장하는 역할 등 흙을 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일을 잡초가 수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도심 공터를 녹화하는 잡초>

※ 제목 설명
위 ‘화화인인(花和人仁)’은 ‘꽃은 어울리고, 사람은 어질다’라는 뜻으로 자가제작한 표현인데, 꽃마실 카페 여는 잔치의 부제이기도 했다.
중문식으로 보자면 ‘꽃이 사람과 더불어 어질다’라는 뜻이 될 텐데, 더 나아가 ‘꽃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사람이 어질 수 있다’는 확대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동산바치 소개
본 코너지기인 동산바치 김근오는 현재 전주에서 ‘꽃마실’이라는 플라워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원예학을 전공했으며, 귀농을 준비한 지 오래되었고, 꾸준히 텃밭농사도 짓고 있다. 틈틈이 산과 들의 식물들을 만나며 관련지식을 쌓아 가는 중이라고.

동산바치 : 원예사 또는 정원사(gardener)를 뜻하는 순우리말.

[편집자] <동산바치의 花和人仁>은 월 1회, 네째 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