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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엘라이로 산다는 것

[정은애의 ‘퀴어 이야기’(4)] 성소수자부모모임


... 편집부 (2018-09-06 15: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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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은애)

오래 알던 지인에게 아이의 성별 정정 신청에 따른 진술서를 부탁하였다.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정정을 위해서는 지인들이 주민등록등본 첨부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을 노출하면서까지 인우보증을 서고 진술을 해야 한다.
고맙게도 부탁드렸던 대부분의 지인들이 그 과정을 흔쾌히 허락하고 아이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모습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해 새로 공부하고 생각하고 물어가며 진술서를 써주셨다.

“얼마 전 수술을 받고 호르몬주사를 맞으면서 서서히 변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참 먼 길을 돌아왔구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해본 경험에 의하면 겉모습도 중요하지만 사회 관념상 남성으로 인정받는 가장 우선적인 조건이 법적인 조건이라고 사료됩니다.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정신적으로는 남성인 아이에게 가족 친지 이웃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판사님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인의 성정체성을 인정하기까지 그 아이가 얼마나 고민하고 갈등하고 혼란스러웠을지 생각하면, 그래서 고통을 감수하고 수술까지 감행한 당사자를 생각하면 이제는 어른들이 그리고 사회가 다 같이 인정하고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와 같이 써 있는 진술서를 보고 성소수자부모로서 느끼는 점이 많았다.
그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대해 말과 글로써 문제점을 알리고 호소하고 분노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혹은 그러다 불편해지거나 소원해질까봐서 구체적인 마음까지는 물어보지 못했던 터이다.
진술서를 하나하나 읽어보며 나와 아이를 아끼고 지지하는 지인들의 사랑에 감동하며 한편으로는 그분들의 사고방식이 멋있어서 감탄하였다.

멋있는 사람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물론 어떤 힘이라도 사람의 타고난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멋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의 본질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는다.
보통 사람들은 주어진 의무와 ‘사회통념’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착실하게 사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느라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살 때 가장 행복한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이 좋은 시절을 보낸다.
나이가 좀 많이 들어서야 자기답게 사는 삶이나 진정으로 행복한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갖는데 그때까지도 ‘사회통념’에 갇혀서인지, 깨달음을 삶으로 실천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는 판단 때문인지 몰라도 이제까지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멋있는 사람은 그게 어느 때라도 나이가 많든 적든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그걸 삶으로 실천한다.
여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세상이나 지식이라도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체험하고 동참하며 응원하고 협력한다.
그 지인도 평생 동안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에 다니며 가장 무난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특별한(!) 사람을 볼 일이 많지 않았으나 주변에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하고 물어보며 따뜻한 관심과 환대의 자세로 아이를 지지해주고 있다.
알아 온 세월이 긴 시간이라 그 지인의 사람 대하는 방식, 삶을 대하는 방식을 그간 많이 보아왔으나 글로 표현한 생각을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한편으로 그간 거리에서 보아오던 사람들, 이를테면 혐오를 대놓고 표현하는 사람들과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 사회 의식수준이나 인권지수가 이만큼인가 했던 섣부른 실망이 미안해지며 그 한 사람의 지지만으로도 세상이 살만하고 숨 쉴 만한 곳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그러면서 학교뿐 아니라 직장에서까지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혐오범죄인 왕따 피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왜곡된 의식으로 인해 왕따가 자행되는데 그 과정에는 왕따를 주도하는 가해자뿐 아니라 동조자와 방관자가 있기에 왕따 행위가 이루어지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미 약자라는 위치에 놓여 있기에 온힘을 다해 저항해도 가해자와 같은 힘을 낼 수 없는 형편에 동조자와 방관자까지 가세하면 피해자는 더욱 무력해진다.
피해자가 혼자 힘으로만 방어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럴 때 피해자의 편에서 가해자를 제지하는 방어자, 엘라이(지지자·연대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피해자는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큰 비가 올 때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우산을 쓰면 그 비를 견디고 안전지대로 대피할수 있지 않는가.
약자에게 엘라이들은 그런 우산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성소수자 엘라이라 해서 다를 게 없다.
사회적 혐오와 차별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잘 알고 그런 말들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사람을 볼 때 “멈춰! 그만해, 그건 범죄야”라고 제재의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고 당당함이다.
또한 꼭 행동으로 가해자를 직접 제재하지 않더라도 피해자에게 지지하고 연대할 수 있다.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어 자기의 고통을 토로한다면 무얼 직접적으로 도와주지 않더라도 조용히 그 아픔을 같이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 당사자는 큰 위로가 되고 힘을 얻게 되지 않는가!

성소수자의 어려움도 마찬가지다.
주위에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혔을 때 어렵게 용기 내어 커밍아웃한 친구에게 어설픈 충고보다는“많이 힘들었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서 고마워.”라고 표현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가장 훌륭한 지지이다.
물론 조심하여야 할 부분이 있다.
가까운 사람의 커밍아웃에 당황스럽겠지만 어떤 선의로라도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변에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아웃팅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어떠한 도움의 행동과 표현도 반드시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여야만 한다.

지지와 연대는 비단 약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소수자와 약자가 살기 좋은 사회는 비소수자와 약자 아닌 모든 사람도 살기 좋은 사회이다.
누구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스스로 안에 있지만 그 능력이 발현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혼자서 빨리 갈 수는 있으나 인생사라는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내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연대하고 지지할 때 다른 사람 또한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의 지지자·연대자가 되어줄 것이다.
지구별이라는 행성에 사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 커밍아웃: 성소수자가 스스로 자기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벽장 밖으로 나오다)
- 아웃팅: 본인은 원하지 않는데,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강제로 밝혀지는 일(벽장으로부터 내보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