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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삶과 문학의 진정성

수현이의 문학생각 - 한국현대문학 읽기(15.최종회-윤동주)


... 문수현 (2020-05-20 07:20:00)

(글 문수현, 그림 강현화)

<쉽게 씨워진 詩>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어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이 시는 윤동주(1917-45)가 일본 유학중이던 1942년 6월 3일에 완성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서울에 있던 절친 강처중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 해방 후 최초로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문과 더불어 발표됐다.


△ 윤동주. 그림 강현화

과연 이 시는 제목대로 쉽게 씌어졌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더구나 자기 속의 진실을 표현해내려 할 때 더욱 어렵다. 시가 쉽게 씌어져 부끄럽다는 것은, 시적 화자가 내던져진 그 시대의 어둠에 비하면 시 쓰기는 가벼울 뿐이라는 자괴감이 담겨진 표현이다.

하지만 시인은 허무에 빠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린다. 그리고 ‘홀로 침전하는’ ‘부끄러운’ 자아에게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의 악수를 교환한다. 밝은 아침과도 같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씩씩하게 나아가겠다는 시인의 미래 지향적 의지가 진한 감동을 준다.

윤동주는 다른 시에서도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적 독백 속에서 솔직하고 섬세하게 성찰한다. 대표적으로 「서시」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두에 붙여진 작품이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는 그때까지 써놓은 시 중에서 18편을 뽑았다. 그리고 시집 첫 머리에 놓을 ‘서시’를 위와 같이 완성했다. 1941년 11월 20일의 일이다. 그는 이들 19편을 묶어 졸업 기념으로 자신의 첫 시집을 출간하려 했으나, 그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시집 첫 머리에 놓는 ‘서시(序詩)’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할 텐데, 이 시는 그의 시 세계 전체에 흐르는 양심과 부끄러움 그리고 고뇌의 문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쉽게 씌어진 시」(1942.6.3)에서는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탄식했고, 「참회록」(1942.1.24)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라며 혼신의 힘으로 각성했다. 그리고 「서시」에서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삶의 원칙을 천명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노라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날카로운 언어로 반성한다.

그가 이 시들을 쓴 때는 삶 전체가 치욕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식민지 상황이었다. 특히, 일제가 1937년 일으킨 중일전쟁을 수년 째 대규모로 끌어가는 와중에 미국 본토에까지 공습(1941.12.7)을 감행해 미일전쟁을 개시한 직후였다.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규정하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논란이 있지만, 그의 시가 분명한 저항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윤동주는 친일파?

그런 윤동주는 고등학교 때 이후로 줄곧 나의 문학적 사표(師表)였다. 그가 ‘서시’를 창작한 것도, 그리고 그 시의 첫 구절을 ‘죽음’이라는 말로 시작한 것도 나에겐 감동이었다. 문학과 삶을 대하는 그의 진정성이 무섭게 다가왔다. 고교를 졸업하던 1980년대 후반 무렵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민중가요 ‘서시’를 듣고 단번에 익혀 따라 부르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 뒤로 부끄럼 많은 삶을 살아왔다. 다만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삶을 살지는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러다가 뜻밖의 경험을 했다. 몇 년 전 일인데 아직 여운이 있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학생 출신의 한 노동운동가로부터 들은 말 때문이다. 나는 그가 연세대 국문과를 다닌 분이라는 걸 알고 “윤동주를 선배로 둔 셈인데 자랑스럽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뜻밖에도 “윤동주는 친일파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그에게 왜 윤동주를 친일파라 보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 주제로 반론을 펼칠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조사해보니 ‘윤동주=친일파’ 주장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하고 학술적인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고, 나도 더 공부를 할 생각이다. 다만 여기서는 창씨개명은 친일파와 관계가 없었다는 주장을 소개하는 데 그치려 한다.

한국 현대 지식인의 역사를 연구한 윤소영 교수는 창씨개명이 친일파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정은 일본유학에 있었다. 윤 교수는 한국인 최고의 애송시 「서시」에 나오는 ‘부끄럼’과 ‘괴로움’이 창씨개명과 관련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는 점도 소개한다.

‘평전문학의 전범’이라는 상찬을 받은 『윤동주 평전』에서 송우혜 작가도 “1942년 1월 24일에 쓴 시 「참회록」은 창씨개명계 계출로 인한 고통을 담고 있다.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그걸 위해선 자신의 손으로 모교에 창씨개명계를 계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각오했을 때, 그 뼈아픈 욕됨으로 인해 쓰인 것이 곧 「참회록」이다”라고 했다.

나아가 윤소영 교수는 “창씨개명은 친일파의 필요조건도 아니었는데, 예를 들어 윤덕영은 창씨개명에 반대했다. 문학가 중에서 이광수·김동인은 찬성인 반면 최남선·염상섭은 반대였다. 그밖에 김성수·윤보선·방응모 등도 반대였다”고 지적했다. 결국 창씨개명이라는 잣대로 친일파 여부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이런 논란은 윤동주의 전기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논박될 수 있다. 평전에 따르면 윤동주는 그의 절친인 민족주의자 송몽규를 추종했고, 일본 유학 중 송몽규가 주도한 ‘재 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에 연루돼 그와 함께 옥사했다.

송우혜 작가는 당시 일본 재판소의 판결문 등의 분석을 통해 송몽규와 윤동주를 ‘옥사’에까지 몰고 간 이 사건의 발단은 당시 실시 직전에 있던 ‘조선인 징병제’였다고 결론짓는다. “‘조선인 징병제도’를 조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이용해야 한다”는 (특히 송몽규의) 사상에 대해 일제 공안당국이 극도로 위험시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혐의는 ‘독립운동’이었다.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8월 광복절에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송몽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강처중은 누구인가

송몽규와 함께 윤동주의 또 다른 절친은 강처중이었다. 강처중은 윤동주와 연희전문 동기동창이었고,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기도 했다. 그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쓴 시 중에서 현재 알려져 있는 시 5편 전부와, 윤동주가 일본에 가면서 서울에 두고 간 책들과 연전 졸업 앨범 등 유품들을 모두 보관해냈다가 해방 뒤에 윤동주의 동생인 윤일주 교수에게 전해 주었고, 해방 뒤에는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세상에 알리고 그의 초간본 시집을 출간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송우혜, 2016).

따라서 강처중은 윤동주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빠뜨려선 안 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강처중은 윤동주 문학과 전기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돼왔다. 1948년 월남한 윤동주 시인의 동생 윤일주 교수가 강처중이 좌익 인사라는 이유로 그 존재와 이름을 윤동주로부터 떼어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반면 윤동주 시인을 민족시인의 전형으로 삼으려는 입장도 늘 있어왔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 싶다. 윤동주는 한국인의 자랑일 뿐 아니라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는 시인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 강처중(왼쪽)과 송몽규.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지를 윤동주에게 몸소 보여준 존재였다.

[뒷이야기] 『윤동주 평전』을 읽은 뒤 강처중 선생님에 대해 더 조사해보고 싶었다. 한국전쟁 초기 소련 유학길을 떠나겠다고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는 가족의 증언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었지만, 『윤동주 평전』에 소개된 것 이상의 자세한 정보를 찾기는 어려웠다.

2017년 송우혜 작가님께 전화로 여쭤 강처중 선생님의 유족 연락처를 받았고 문경에 사는 차남 강준민님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에 자료부족을 탓하며 취재기를 쓰지 못한 게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참고로, 1995년 국내의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한 윤동주 전집의 편집자는 초판에 강처중의 부탁으로 정지용이 쓴 서문은 그대로 두고, 역시 초판에 실린 강처중의 발문은 뺐다. 대신 문익환의 서문을 새로 추가했다. 당시 무명이던 윤동주의 데뷔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간행됐는데, 유고 31편을 실었다. 작품 선별과 편집을 강처중이 담당했다.

[참고문헌]
송우혜, 『윤동주 평전』(제3차 개정판), 서정시학, 2016
김윤식, 『고교생과 함께하는 김윤식 교수의 시 특강(1)』, 한국문학사, 1997
윤소영,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Ⅰ·Ⅱ』, 공감, 2020

[글쓴이 문수현은]
전북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전북교육신문 기자
[그린이 강현화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시골살이를 하고 있다.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변변치 않은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동시 연재를 위한 지면을 제공해준 '광주드림'과 황해윤 기자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조만간 새로운 주제로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