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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만에 율곡 이이의 모든 것 만난다

율곡연구원 『교감본 율곡전서』 간행... 전주대 오항녕 교수 연구팀 정본화 업적


  (  문수현   2020년 06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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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항녕 교수. 사진제공=전주대학교

율곡연구원이 『교감본 율곡전서』를 펴냈다. 기호학파의 영수인 율곡 이이의 자료를 최대한 집성하고 정본화한 업적이다.

연구책임자인 전주대 사학과 오항녕 교수(조선후기사 전공)는 전북교육신문과 통화에서 “퇴계와 율곡의 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에 이전 인간형들과 다른 새로운 인간형들이 만들어지고, 영조·정조 시대까지 그런 사람들이 지지를 받으며 조선을 움직였던 것 같다”고 했다.

오 교수는 그들의 면모에 대해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의병활동을 한다든지, 지역사회에서 리더로서 역할을 한다든지, 개인적으로는 일찍 일어나 공부하고 자기엄격성을 갖는다든지 하는 종류의 유형들”이라며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도 대동법이나 균형법 같은 조선의 개혁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이 대체로 중종·명종 때 생겨나고 그들이 선조(1552~1608) 때 대대적으로 입신해 목릉성세를 이룬 것”이라고 했다.

오 교수는 이번 연구작업을 통해 ‘율곡전서’의 정본화 작업을 90%이상 이뤘다고 했다.

오 교수는 율곡 이이 자료의 정본화 이후에도 율곡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정본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기호학파의 학맥과 사상을 밝히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3권 1질인 이번 『교감본 율곡전서』는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에서 수행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자료 집성(集成)과 정본화(定本化)” 연구(연구책임자 오항녕 교수)의 성과다.

『교감본 율곡전서』의 간행을 가능케 한 “율곡 이이의 자료 집성과 정본화” 사업팀에는 오항녕 교수 외에, 정석태(부산대), 김경호(전남대), 김태완(숭실대), 이동국(예술의전당), 정재훈(경북대), 정해득(한신대), 이희중․이상돈(서울대), 이경동(고려대), 이인복(경북대) 등 국내의 역사, 철학, 서지학 연구자들이 두루 참여해 작업의 완성도를 높였다.

오항녕 교수는 이번 『교감본 율곡전서』 간행에 대해 “집을 지을 때 좋은 벽돌과 나무가 필요하듯이, 인물 연구에는 그가 남긴 문집에 대한 믿을 수 있는 정본(正本)이 필요하다. 칸트나 마르크스 연구도 그들의 저술을 정본화하는 데서 출발했다. 근래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에 대한 정본화 연구가 진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감본 율곡전서』는 율곡 이이의 역사적 위상에 걸맞는 정본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박원재 율곡연구원장 또한 “율곡학이라는 대해를 항해하는 데 필수적인 최신 나침반을 새로 마련한 격”이라고 자평하면서 “『교감본 율곡전서』가 율곡학 연구가 한 단계 도약하는 데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율곡연구원(033-642-4982)에서는 율곡학 진흥 차원에서 이번에 간행된 『교감본 율곡전서』를 희망하는 사람에게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다.

다음은 오항녕 교수가 『교감본 율곡전서』 간행의 의의를 정리한 글이다.



<율곡전서를 새로 간행하는 까닭은?>

아홉 번 과거에서 장원을 했다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과거시험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은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을 담은 뛰어난 문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중국 북경까지 알려져 조선에 오는 사신들은 이 글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어 했고, 만나면 영광으로 생각했다. 율곡연보에 보면 「천도책」은 23세인 무오년(1558) 작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명종실록』이나 당시 시험관이었던 양응정(梁應鼎)의 『송천집(松川集)』 같은 기록에 따르면 『천도책』은 갑자년인 1564년 작품이다. 한편 율곡이 강릉 경포대를 보고 지었다는 「경포대의 노래(鏡浦臺賦)」는 어떨까? 이 글은 율곡이 10세 때 지은 것이라고 『율곡전서』에 나와 있다. 이 글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강릉부사였던 조하망(曺夏望)이 율곡의 외가에서 구했다고 하여 『율곡전서』에 수록된 것이다. 이게 사실일까? 이 글이 정말 율곡의 글일까?

이런 착오나 의심스러운 정황이 생긴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율곡 이이는 병조판서, 이조판서로 격무에 시달리다가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시문을 수습할 겨를이 없었고, 친구 성혼(成渾)과 제자 몇몇이 사후에 정리하였다가 문집으로 간행했다. 둘째,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자들은 스승을 높이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세월이 흘러 당시 일을 잘 모르기도 해서 본의 아니게 스승의 업적을 과장하다가 오류를 저지르기도 한다. 『율곡전서』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았다. 율곡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글자 하나하나를 대조 검토한 새로운 『율곡전서栗谷全書』가 필요한 이유이다. 율곡연구원(원장 : 박원재)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율곡학 연구의 기반 확충을 위해 율곡에 대한 자료를 집대성한 ‘21세기 판 율곡전서’를 『교감본 율곡전서』(3권 1질)라는 제목으로 새로이 간행하였다.

<90여만 자에 달하는 『율곡전서』 10여 종의 판본 일일이 대조>

3권 1질인 이번 『교감본 율곡전서』는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에서 수행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자료 집성(集成)과 정본화(定本化)” 연구(연구책임자 오항녕 전주대 교수)의 성과이다. 이 연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관하는 〈한국학 분야 토대연구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부터 2016년까지 3년간 진행되었다. 연구단은 3년 동안 90여만 자에 달하는 『율곡전서』를 10여 종의 비교본과 일일이 대조 확인해 『교감본 율곡전서』를 완성했다. 교감과 표점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10여 차례에 걸친 워크숍을 개최했으며, 교감 범례를 작성하여 교감의 정확성과 통일성을 제고하였다. 특히 작품별로 자료의 연혁과 작성 시기 등 연대 고증을 포함한 저작보(著作譜)를 추가 제공함으로써 율곡의 행적과 교류 등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율곡 사후 그의 저술에 대한 간행 작업은 지금까지 모두 네 번 있었다. 율곡이 세상을 뜬 지 27년 뒤인 1611년(광해군3)에 간행된 『율곡집』이 첫 번째이다. 율곡의 제자인 박여룡(朴汝龍), 김장생(金長生) 등이 해주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집 1권과 문집 9권으로 이루어진 소략한 분량이었던 까닭에 1682년(숙종8)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초간본에서 누락된 것들을 모아 속집 4권, 별집 4권, 외집 2권의 분량으로 재편집하여 간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749년(영조18) 노론-낙론계 거두인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가 기존의 문집을 한 데 모은 뒤 여기에 『성학집요』와 『격몽요결』 등을 추가하여 편찬한 뒤, 홍계희(洪啓禧)가 습유를 추가하여 44권 38책으로 간행하였다. 이것이 현재 전해지는 『율곡전서』의 모본(母本)인데, 이 판본은 1814년(순조14)에 다시 중간(重刊)되었다.

『율곡전서』는 중국 송나라 학자였던 정이(程頤)와 정호(程顥) 형제의 문집인 『이정전서(二程全書)』의 체제를 본뜬 것이다. 시문(詩文)과 함께 『격몽요결』, 『성학집요』, 『경연일기』 등 율곡의 단독 저술을 망라하여 ‘율곡집’ 또는 ‘율곡선생집’이 아닌 ‘율곡전서’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이 『율곡전서』는 이전에 전해지던 모본(母本) 문집들과 차이가 있었고, 일부 작품이 새롭게 추가되는 등 자료의 연혁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교감본 율곡전서』는 이런 점들을 감안하여 1611년에 간행된 『율곡집』과 1682년 박세채가 편성·간행한 『율곡속집』, 『율곡전서』, 『율곡별집』 등에 수록된 작품들 또한 『율곡전서』의 동일 작품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교감을 거쳤다. 그리고 편집 체제는 이재의 『율곡전서』의 기본 편성을 유지하되 교감을 통해 오탈자를 바로잡았고, 한국고전번역원(원장 신승운)에서 제공한 「한국문집 번역·교점 지침 및 사례」에 따라 현대식 표점(標點)도 표시하여 전문 학자의 연구에 기여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율곡전서』의 국제화에도 편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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