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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혁명 120주년, 전봉준을 다시 말한다

[인터뷰] 『봉준이, 온다』 출간 2년, 작가 이광재에게 묻다


... 문수현 (2014-07-14 01:17:12)

소설가 이광재씨는 196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전북대 철학과를 다녔다. 뭔가 고민 있는 다른 친구들처럼 작가도 80년대 초반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몸담았고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았다.

1989년 무크지 『녹두꽃』에 단편 「아버지와 딸」을 게재하면서 등단했고 1992년 소설집 『아버지와 딸』, 1993년 장편소설 『내 가슴의 청보리밭』, 1994년 『폭풍이 지나간 자리』 등을 연이어 냈다.

작가는 그 뒤로 문학적 침묵의 시기를 길게 보내고 재작년 『봉준이, 온다』로 문단에 다시 등장했다. 그의 복귀는 작가 개인에게나 문단에게나 결코 가벼운 일일 수 없다. 더구나 작가는 두툼한 참고문헌 목록까지 첨부한 ‘전봉준 평전’을 들고 나오지 않았는가.

지난 10일 오전 전주시 평화동에 있는 그의 조그만 작업실 인근의 찻집에서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의 저자 이광재씨를 만났다. 그는 전주 인후도서관에서 청소년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동학농민혁명은 현재형이다”라는 주제의 강연을 이틀 앞두고 있었다.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통해 ‘평전’을 쓴 동기와 집필 과정의 에피소드, 기존의 전봉준 평전과 이 작품의 차별성, 이 작품에서 펼친 새로운 가설[추론]에 대한 역사학계의 (무)반응,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그의 관점, 그의 문학관 등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전봉준 평전을 쓴 동기를 묻고 싶습니다.

제가 20대 후반, 30대 초반 무렵까지 글을 쓰다가 가족생계문제로 글을 손에서 놨어요. 그러다가 최종 밥벌이는 서울의 조그만 재단활동이었는데, 그 재단에서 뭔가 하나 기획한 사업이 잘 안됐어요. 그게 실패하면서 그만두고 내려오면서 몇 개월 고민을 했어요.

전에 내가 글을 썼던 사람인데, 내가 글을 썼던 자인지, 아니면 쓰는 자인지, 아니면 앞으로 쓸 자인지, 기왕에 밥벌이는 손에서 놓쳤으니까 한번 써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뭘 쓸 것인가 고민하다가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당대의 문제를 발언하지 않는다면 그건 작가로서의 사명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저는 2014년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만을 당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당대의 연원, 이 당대가 오늘날 이 모양으로 펼쳐지게 된 연원부터를 저는 당대라고 생각하고, 그걸 우리사회의 근대[현대]라고 봤어요. 근대는 이 시스템 바로 직전의 이야기, 다시 말하면 이 시스템이 존재하게 된 결정적 배경을 잉태하고 있는 지점이죠.

그래서 저는 그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별로 관심이 없어요. 예를 들면 광해군은 문학적으로는 상당히 매력 있는 인물이지만 지금 우리하고는 그렇게 큰 연관이 없어요. 그냥 과거의 주요했던 한 지점에 서있던 군주 정도의 의미죠. 세종대왕이나 이순신도 저한텐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우리의 근대는 어디부터인가? 제 생각엔 핵심적인 근대의 요건은 신분제 철폐와 해체, 전근대적인 제도의 혁파에요. 그리고 이 땅에서 전(前) 근대를 뒷받침하고 있던 시스템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었던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다고 본 거죠. 그렇다면 내가 글을 써야 되는 지점은 그 지점부터구나, 내가 맨 시작으로 올라가서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을 먼저 언급하는 게 타당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전봉준까지 가게 된 거에요.



○ 상당히 어려운 얘깁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기점을 달리 잡을 수도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일제강점기가 더 직접적으로 현재에 영향을 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는 분들도 있겠죠. 아니면 좀 더 애국적인 사고를 하는 분들은 더 이전 시대인 영정조 대까지 끌고 가기도 해요. 그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적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이렇게 얘길 하죠. 그런데 저는 신분제 혁파가 핵심이라고 봐요. 유럽에서도 근대혁명은 절대군주에 맞서서 싸우면서 일어납니다. 프랑스혁명도 자유·평등·박애의 기치를 내걸고 싸웠던 거잖아요. 여기서 평등이 뭡니까? 바로 신분제 문제를 제기하는 거거든요. 우리 사회에서 그게 전면적으로 언급되고 그것을 깨부수려고 노력했던 지점은 바로 동학농민혁명이었다고 본 거에요. 일제 강점기가 아니고요.

동학농민혁명과 일제 강점기는 긴밀하게 연관되기도 합니다. 농민혁명 시기에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이기지 못함으로써 일제식민지화라는 수순으로 간 거죠. 다시 말하면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에 최초로 제동을 건 게 바로 농민혁명이었던 거죠.

○ 전봉준의 일대기를 구성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전봉준은 1893년도 무렵부터 공식적이고 주목할 만한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1894년도에 계속 나타났다가 사망하는 1895년도까지 나타나요. 그 이전의 전봉준에 대해서는 마을에 살던 중·저층의 지식인들이 자기의 삶을 기록하는 회고록 같은 데서 가끔 언급되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그 이전 학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내용, 일본 쪽 기록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내용, 전봉준이 자기 공초에서 살았던 이야기 조금 정도죠.

○ 향촌 지식인들의 회고록 류가 쓰인 시점은 1893년 이전인가요?

그렇죠. 그 이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단편적으로 여러 토막토막이 존재하고, 1920년대부터 이 사건들에 흥미를 가지고 기록하러 취재를 왔던 기자나 일본인 역사가, 한국역사가들이 그 동네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이 있고요. 다음으로 그 지역에 살았던 어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정도에요. 그 편린들을 꿰서 전봉준의 일대기를 구성해야 하는 거죠. 비록 그런 조각 내용들이 다른 농민혁명 지도자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많지만, 이들 조각들의 틈과 틈 사이 거리들이 꽤 있어요.

○ 그 틈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했나요?

확보할 수 있는 자료는 다시 말하면 ‘전봉준이 고창에서 태어났다더라.’, ‘원평에서 잠시 살았다더라.’ 이런 것들이지, 그 사이에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는 확인할 방법이 거의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그 사이의 일들은 다른 방식으로 추리를 하는 수밖에 없어요.

○ 예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가령 ‘원평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로부터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두령 중 한 사람인 김덕명과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어요. 원평의 김덕명이라는 사람은 전봉준의 외가 쪽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데, 전봉준보다 10년이 연상이에요. 전봉준이 원평에서 10대를 거의 살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김덕명은 그 당시에 20대겠죠.

그러면 김덕명의 20대는 어땠나. 김덕명의 20대를 보면 전봉준의 10대가 얼추 보이는 거 아니겠나. 김덕명이 전봉준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10대 소년에게 20대 청년이란 엄청난 어른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이 어떤 정신적 교감을 주고받았을 수 있겠다는 거죠.

김덕명은 그 시대에 뭐 했나. 그래서 김덕명에 대한 기록들을 봤더니, 문중회의 때 ‘돈을 바쳐서 벼슬을 사라’고 하는 문중사람을 향해 재떨이를 집어던지면서 싸움을 했다든가, 어렸을 때부터 유학을 공부했으나 그만두고 세상을 알아보기 위해 전국을 유랑했다거나, 이런 기록들이 있단 말이죠. 아, 이 사람 김덕명의 세계의식을 알겠어요. 이 사람이 어떤 고뇌를 하고 어떤 고민을 하면서 세계를 유랑했는가, 그런 것을 알겠어요. 그러면 그 무렵에 이미 김덕명이란 사람에겐 세계에 불만을 가지고 세계를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겠구나, 그 당시 전체 민중이 그랬듯이. 그렇다면 그런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전봉준에게도 이입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전봉준이 20대 무렵 혹은 10대 후반에 태인 동곡리 지금실로 이사를 간단 말이에요. 거기서 김개남하고 아예 이웃집에 살았단 말이죠. 그 팔팔한 20대 둘이 만나서 뭐 했겠어요? 김덕명하고 같이 만났겠죠, 아마? 친구의 친구는 친구니까. 자주 만나서 술집에서 술상 두드리면서 뭐 했겠어요? 그런 얘기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면서 이미 시작됐을 거예요 그때.

그리고 전봉준이 송씨하고 결혼하면서 송희옥이라는 사람하고도 친교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김덕명, 전봉준, 김개남, 송희옥 핵심 거두 네 명이 전봉준의 20대에 벌써 만남을 가졌단 얘기잖아요. 관계로 묶여있었단 얘기잖아요. 그 20대 젊은이들이 그 시절에 무슨 이야기를 하였을까?

그들이 만나서 무슨 얘길 했다는 기록은 물론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당대의 시대를 본 거죠. 그 지점에 조선시대의 시대를 갖다가 놓은 거예요. 그걸 봤더니 20대에 시절이 아주 복잡해요. 이양선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병인양요·신미양요가 벌어지고 세도정권이 물러가고 대원군이 등장하고, 이런 시절이 펼쳐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30대에는 어떻게 됐나 봤더니, 대원군이 쫓겨나고 고종이 신정체제를 하면서 민씨들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기 시작하고 임오군란·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그랬단 말이죠. 조선사회가 그 지경일 때 이건 뭐 어떻게 되겠어요, 빤하겠다, 그런 방식으로 엮어나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초반부에 다소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도대체 전봉준은 언제 나와?(웃음)’ 하지만 그건 좀 불가피했어요. 소설이라면 소년시절 이야기를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겠지만 이건 소설은 아니잖아요. 사실을 중심으로 관점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단언하건대, 20대에 이미 그들의 운동은 시작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중심에 전봉준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초반에는 전봉준이 김덕명한테서 영향을 받았겠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놓고 보면 전봉준이 항상 중심에 있어요. 김개남하고 동곡리에 같이 살았고, 송희옥은 처갓집 사람이고, 최경준은 전봉준이 다니면서 사귀었다고 하고, 손화중은 전봉준이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꼬셨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건 손화중의 부인이 한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다 엮고 다닌 게 전봉준인 거예요. 김덕명을 가운데 놓으면 그림이 안 그려져요. 송희옥과의 관계가 안 그려지잖아요. 김개남하고도 안 그려지고. 전봉준을 딱 가운데 세우면 그림이 다 그려져요.

그래서 전봉준이 총대장이 된 거죠. 동학의 서열로 보면 전봉준은 접주고 김개남, 김덕명, 송화중은 대접주에요. 다른 종교에 비유하자면 전봉준은 한 성당의 신부고, 김개남 등은 교구장인 셈이죠. 그러니까 동학의 위계상으로 놓고 보면 전봉준이 대장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왜 전봉준이 대장이 됐겠어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대장노릇을 전봉준이 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것 때문은 아닌데, 하여튼 저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에 반대해요. 제가 동학을 우습게 아는 건 아니에요. 저는 동학을 좋아해요.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아니라 조선농민혁명이에요. 조선농민전쟁이거나. 독일은 독일농민전쟁이라고 하잖아요. 거기에는 이데올로기가 개입이 안 돼 있나요? 칼뱅이나 루터를 중심으로 급진적 기독교세력들의 입김이 다 거기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왜 기독교농민혁명이라고 않고 독일농민혁명이라고 할까요. 그게 가장 간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말 들으면 이해가 되기 때문이에요. 동학농민혁명? 이해가 안 돼요. 조선농민혁명? 이해가 돼요. 그렇잖아요?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100% 동학교도였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아니죠. 그런데 왜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해요, 조선농민혁명이라고 해야지.

○ 왜 그럴까요?

국가가 역사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한 거죠. 동학농민혁명이라 하면 세계적으로 굉장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을 세계화하기는 기대하기 힘들어요.



○ 『봉준이, 온다』라는 책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됐죠?

통상 평전은 그냥 누구누구 평전, 이렇게 얘기하는 게 간명해요. 책 제목을 이렇게 『봉준이, 온다』로 제안한 지인이 있기도 했습니다만, 어쨌든 장군 칭호 앞에는 언제나 공식이름을 갖다 붙이는 게 상례죠. 예를 들어, 이순신장군이에요. 그런데 전봉준은 민중들이 녹두장군이라고 했어요. 지금이니까 전봉준장군이라고 얘기하지, 옛날에 어른들은 다 녹두장군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왜 이 사람은 전봉준장군이라고 않고 별명을 앞에다 붙여가지고 장군이라고 했을까요? 이건 이 사람을 거대한 위인으로 생각한다기보다 내 옆집에 나와 우리와 함께 했던 나의 두령, 우리의 두령이라는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전봉준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기보다도 진짜 사랑을 받은 장군이었던 거죠. 이순신장군 하면 존경의 뜻이 담기죠.

○ 성웅이순신이라고 하듯이요.

그렇죠. 그런데 녹두장군 할 때의 장군은 존경심도 물론 없진 않지만 애정의 대상이에요. 애정과 친근감. 말하자면 개똥장군, 이런 거잖아요. 별명이 개똥이었으면 개똥장군이었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봉준이가 맞는 거죠(웃음).

○ 참고문헌이 많습니다.

엄청 많죠. 책 후미에 있는 목록들을 정말 다 읽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전봉준에 관한 책들은 나온 게 꽤 있어요. 그런데 전봉준에 관해 쓰면서 그런 책들을 다 뛰어넘어버리지 않으면 내가 쓰는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전봉준과 관련된 모든 언급들, 기록들을 다 갖다놓고 기록을 대조해서 내가 하겠다, 그런 생각이었죠. 그래서 닥치는 대로 논문을 갖다놓고 읽었어요.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나는 이거 안 하면 죽는다, 이거 아니면 할 것도 없고, 돈도 못 벌고, 내가 그렇게 평생을 목매달았던 글쓰기인데, 새로운 시작인데….’ 그런 절박함을 가지고 한 6개월 읽으니까 대략 읽히더라고요. 밤낮없이 읽었더니, 집중력이 뛰어나서 그런지 몰라도 독서의 속도가 엄청났어요. 이 책 저 책 잡학으로 막 읽었는데도 그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정돈이 되더라고요. 전봉준과 농민들을 이 사람은 이렇게 평가했구나 하는 것들이 다 머릿속에 입력됐고, 이 문제는 저 사람의 평가나 이 사람의 평가도 아니고 내 판단대로라면 이게 맞은데? 이렇게 정돈이 좀 됐어요.

○ 기왕의 학설이나 가설들에서 오류를 찾아냈다는 말씀이신데, 예를 들어 어떤 게 있습니까?

송희옥의 예를 들어보죠. 송희옥은 전봉준의 처가 쪽 사람이에요. 송희옥이 1차 봉기 때 정백현과 함께 전봉준의 비서 역할을 합니다. 집강소 시절에는 도집강을 하고요. 도집강이라면 (전라감사) 김학진과 동급이에요. 그런데 이 송희옥이 어디 사람이냐 하는 거죠. 전봉준의 판결문에 보면 ‘부안사람 송희옥과 더불어’라는 표현이 나와요, 이를 두고 역사학자들이 다 송희옥의 활동근거지가 부안이라고 얘기해요. 하지만 이는 맞지 않습니다.

‘대원군의 밀사와 송희옥, 김개남, 전봉준이 전주 구미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주 구미리는 지금의 완주군 봉동이에요. 봉동은 당시에 전주부에 속해 있었고요. 그리고 집강소를 만들 때 전봉준이 김학진과 만나서 전주에서 대타협을 하고 난 뒤에 고산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리고 그 다음 기록은 끊겨있죠. 전봉준은 왜 고산에 갔을까요?

전봉준은 김학진과 대타협을 한 뒤에 집강소의 총책임자 자리에 송희옥을 앉혀요. 그렇다면 전봉준이 고산으로 간 건 송희옥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김학진과 얘기가 끝나자마자 고산으로 갔다? 이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어요. 그런데 도집강을 송희옥이 했고, 전봉준은 나중에 밀사를 끊임없이 송희옥 쪽으로 보낸단 말이에요. 거기가 전주로 통하는 통로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전봉준 공초에 이렇게 나와요. ‘송희옥은 어떻게 됐나?’ 이러게 물으니까, ‘근래에 내가 듣기로 고산에서 민병들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한다.’ 농민혁명 당시 붙잡히거나 붙잡혀서 죽은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자기 활동근거지에서 붙잡혔어요. 왜 그 지역으로 도망쳤을까요. 제일 잘 아는 지역이기 때문이에요. 자기를 도와줄 사람들이 제일 많다고 느낀 거죠. 그런데 혁명운동이 부흥할 땐 다 그를 도왔지만, 그게 잠잠해지고 시들어질 때는 안 그런 겁니다. 밀고자가 반드시 그 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서 붙잡혀 죽는 거예요.

제가 그 기록까지 읽고 ‘송희옥은 활동근거지가 봉동, 고산이다.’ 전봉준평전에서 그렇게 주 장했는데도 역사학자들은 입 한마디도 뻥긋 안합니다(웃음). 다만 이번에 전진우라는 작가가 『동백』이라는 소설에서 제 책을 참조했다고 했고, 그 책에서 송희옥을 고산에서 활동한 사람으로 해놨어요. 누가 주장했는지는 얘기하지 않았지만요.

○ 선생님이 그 가설을 처음 주장하신 거군요.

그렇죠. 제가 처음이죠. 근거는 결국 세 가지에요. 대원군의 밀사인 김학진이 구미리, 즉 봉동으로 왔다. 전봉준은 고산으로 갔다는데 왜 갔을까? 송희옥은 그곳에서 민병들한테 죽었다더라. 호남을 딱 놓고 보면 김제·고부·태인 덩어리는 김덕명 부대, 그 밑으로 흥덕·고창·무장·영광·법성포 이쪽까지는 손화중 덩어리, 임실·남원 이쪽은 김개남 덩어리이고, 전부 북쪽에도 덩어리가 하나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송희옥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대원군의 밀사가 봉동 쪽으로 온 거에요.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여러 가지로 불편하니까요.

다른 예를 들어보죠. 전봉준의 자식들에 대한 구전은 있는데, 그의 부인(첫 부인 사망 후 둘째 부인)에 대한 구전은 일체 없어요. 역사학자들이 ‘도망간 거다’라고들 얘기해요. 그래서 역사학자들 상상력이 참으로 빈약하다는 겁니다. 자기 자식을 둔 어미는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여자들이 아니에요, 조선시대 우리 어머니들이. 다른 두령들 부인들은 다 애기 끌어안고 산속으로 도망가거나 어떻게든 살려서 나중에 그 애기들 다 키워냈어요. 그런데 전봉준 부인만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을 것이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겠죠. 그런 얘긴 평전에서는 할 수가 없죠. 소설이라면 할 수가 있겠지만.

○ 작품을 위해 현장답사 다니면서 수집한 이야기는 없나요?

정황들 정도죠. 예를 들면 원평에 가서 ‘전봉준이 서당을 어디로 다녔습니까?’ 하고 물으면 ‘봉남으로 다녔다지.’ 하는 그런 정도에요. 아주 단편적인 것들이에요. 그 단편적인 것들을 꿰야 돼요. 제가 들은 것은 그 정도죠. 그나마도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시골에.



○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현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전봉준은 역사적 사실인데, 작가가 문학적 상상력을 이 작품에서 어디까지 발휘했다는 것인지 독자들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은 없어요. 문학적 상상력은 없고 추론을 한 대목들은 있어요. 송희옥에 관한 얘기처럼요. 어떤 적절한 근거를 가지고 ‘이랬을 것이다’라고 추론하는 대목들은 있지만, 없는 사실을 있는 사실로 상상해서 쓴 건 없어요. 다만 일반 산문과는 다른 문장들을 구사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문학적으로 훈련된 문장들을 사용하고 있는 거죠. 그 점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아요.

○ 이 작품 이전에도 다른 사람들, 예를 들면 역사학자들이 쓴 전봉준 평전이 있죠?

있죠. 그런데 그들이 쓴 평전이란 건 기존 자료들의 짜깁기 수준이에요. 저는 제 평전이 그들 평전에 비해 내세울만한 게 있다면, 참고한 자료가 좀 더 충실하다, 그래서 그들이 미처 다루거나 염두에 두지 못했던 사항들을 언급한 내용들이 있다는 점을 들고 싶어요. 기존 평전들은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원인은 삼정문란이란 식으로 얘기하고 넘어가는데, 저는 당대 조선의 정치사 혹은 경제사를 앞부분에서 상당히 깊이 언급하고 있어요.

삼정문란이라고 하고 넘어가면, 일반인들은 삼정이 뭔지조차도 잘 몰라요,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게 왜 문제였고 어느 정도 심각했고 조선시대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들이 이해되고 설득되지 않으면 동학농민혁명이 이해가 잘 안됩니다. 거기서 끝나나요? 그 당시는 국제관계가 심각한 시절이어서 그런 부분이 언급되지 않으면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해요. 왜 이 사람들이 척양하자고 주장했는지 이해하는 데 실패해요. 본격적인 전봉준 평전은 제 글을 보셔야 돼요. 제가 건방져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 동안의 연구 성과가 가장 충실하게 반영돼있어요.

사학자들은 어디까지나 사학자들일 뿐이지 한 인물을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약해요. 왜냐하면 사학자들은 그 사학적 문헌의 테두리 내에서 인간을 평가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그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어요, 당대의 사회, 정치, 제도, 민중들의 생활사, 풍속 들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질 때 한 인간이 형상화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위대한 역사학자는 위대한 문학가가 될 수 없지만, 위대한 문학가는 위대한 역사학자가 될 수 있어요.

○ 인터뷰 서두에, 이 작품 앞부분이 들어가기 어려울 수 있다고 하셨던가요?

어렵다기보다도 좀 지루할 수가 있다는 건데요, 논증과정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전봉준은 어디에서 태어났나를 논증하는 대목들이 나와요. 그런 논증의 글을 읽어내는 데 사람들이 좀 약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볼 때는 좀 고리타분하게 보일 대목들이 있죠.

제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엇갈려요. 어떤 사람은 ‘아, 지루하다’ 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거, 대단하다’ 해요. 지루하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확실히, 독서력이 약한 사람들이에요. 1년에 책 두 권 읽는 사람들이죠. 자기의 인문적 교양을 쌓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책을 좀 그래도 읽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좋다고 해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게 참 이상하네요(웃음). 하지만 제가 그 사람들 면면을 놓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느낌이 든 겁니다.

○ 그런 분들을 위해서 ‘이 책은 어떻게 읽으면 좋다’고 제안할 수 없을까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조언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책을 안 읽기 때문에. 아예 안 읽으니까. 저와 인연 때문에 갖다놓고 보려고 했던 거지, 스스로 뭔가 지식을 쌓아야겠다는 욕구 때문에 서점에 가서 책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어요.

○ 그럼 이 책의 독자들은 주로 어떤 분들입니까?

이 책은 얼마 팔리지도 않았는데 독자랄 게 있겠어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읽은 거죠.

○ 그렇게 말씀하시니 망설였던 질문을 드릴 수 있겠네요. 얼마나 판매됐나요?

글쎄요. 얼마 안 팔렸을 거예요. 한 4~5천권? 우리 인구 중에 4~5천명이면 누가 읽었겠어요? 인터넷 같은 데 보면 그래도 읽은 사람들이 카페나 블로그에 평 올려놓은 게 간혹 있더라고요. 그렇게 올려놓은 사람들의 평가는 괜찮아요. 그분들은 자기 카페를 운영하면서 자기 독서기록을 올릴 정도면 독서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인 거죠.

○ 청소년들은 어떨까요?

청소년들은 조금 어렵다고 하죠. 우리 딸이 대학교 1학년인데 어렵하고 하네요.

○ 언뜻 생각하기에 청소년들은 국사 배운 지 얼마 안됐고 어른들은 오래 됐는데 왜 청소년들에게 어려울까요?

청소년들은 다이제스트로 다 읽어요. 청소년들이 무슨 톨스토이의 『죄와벌』을 읽겠어요? 안 읽죠. 필요하면 요약줄거리를 읽어버리죠. 웹툰 세대잖아요. 이렇게 막 넘기면서 봐야 되는데, 그 책 못 읽어요.

○ 아마추어 독자들의 평 말고, 본격적인 평은 없었나요?

없습니다. 평론가들 입장에서 보면 이건 문학작품이 아니고, 역사학자들은 얘기 하나요? 보면 자신들이 해놓은 것보다 훨씬 우수한데? 언급 안 하죠.

○ 본 사람이 없는 건 아닐까요?

별로 없기도 해요. 그런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봤을 거예요. (기자가 말씀하신) 이이화 선생한테도 책을 줬거든요. 전진우 작가 같은 경우 『동백』을 쓰기 위해서 역사학자들을 계속 취재했을 거예요 아마. 그리고 책 초반에 제 이름을 언급했잖아요. 자기 분야와 관련된 책은 대체로 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대개 언급 안 하죠. 전진우는 그래도 문학하는 사람이니까 솔직하게 해놓은 거고. 나하고 일면식이 물론 없죠.

○ 전봉준과 관련한 후속 작품도 생각중이신가요?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3부작이 제 생각이에요. 평전, 소설, 영화.

○ 소설 구상을 잠깐 소개한다면?

그동안 전봉준 소설은 여러 편이 있어요. 『녹두장군』부터 『갑오농민전쟁』도 있고, 유현종 선생의 『들불』도 있고, 최근 소설들도 있는데, 『갑오농민전쟁』이나 『녹두장군』은 민중운동사적 관점으로 소설을 쓴 거죠. 북한 같은 경우 그걸 계급운동 관점에서 보고 싶은 거고요. 송기숙 선생(『녹두장군』)의 경우 80년대의 성장하는 민중운동의 눈으로 보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관점으로 쓰려면 굳이 또 한편을 써서 보탤 필요가 없죠.

당시는 조선이라는 권력을 놓고 여러 세력들이 그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벌인 거죠. 고종과 민왕후 세력, 개화파세력, 대원군세력, 위정척사세력, 농민군, 외세가 있고 이런 각기의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조선이라는 권력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거죠. 그리고 농민은 농민의 방식으로 그 과정에 참여한 거죠. 농민의 방식은 뭐겠어요.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없잖아요. 거기에 무슨 시험 봐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러니까 권력을 때려 엎으려고 한 거죠. 그 모든 세력들을 다 등장시켜 쓰려면 굉장히 길어야 되니까 그렇게 하긴 어렵고 전봉준, 대원군, 김홍집 등 몇몇 중심인물들을 내세우려고 해요. 전봉준의 경우 한 집단의 우두머리로서의 고뇌, 정책을 결정하는 순간의 결단과 판단 같은 것들을 보여주려고요. 그 동안엔 분노해서 죽창 들고 뛰어나가는 모습이었다면, 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어요.

○ 아직 구상단계인가요?

한 200장 썼어요. 원고지로. 1천 2~3백장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하면 어딘가에 연재될지도 모르죠. 최대한 빨리 쓰고 싶어요. 올 연말까지는 쓰고 싶은데, 문제는 제가 먹고살아야 된다는 거죠.

○ 『봉준이, 온다』와 관련해서 청소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역사는 단순하게 ‘과거에 어떤 사건이 있었구나.’ 하고 알고자 해서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난 시절의 지혜를 습득하고 지난 시절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자기 각오이거든요. 청소년들은 앞으로 이 세상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사람들인데,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지 않으면 이 세상을 짊어지고 나갈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역사문제에서 매듭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계속 일본이나 중국과 티격태격할 거예요. 역사문제가 호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그건 불가피해요. 앞으로 살아나갈 동력을 얻기 위한 역사를, 외우기 위한 역사가 아니라 그런 역사를 공부해야죠.

○ 문학청소년을 위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문학을 하려면 구체적인 실체에 매우 가까이 가 있어야 해요. 관찰이 필요한 거죠. 철학은 뛰어넘어서 내려다봅니다. 하지만 문학은 매우 세부적인 부분에서의 관찰과 직관이 필요해요. 작가들은 경험을 많이 해야 된다고 하잖아요? 그 경험이란 것은 어떤 진흙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하란 게 아니에요. 술자리마저도 경험인 거예요. 예를 들면, 이 사람이 실연으로 고통스러워할 때의 모습,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어떤 의미, 느낌 이런 것들인 거잖아요. 그런 관찰이 다 경험이죠. 구체적인 일상들에 매우 섬세한 애정과 관찰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연습, 즉 글 쓰는 것도 연습이죠. 연습하지 않으면 절대 못쓰니까요. 일정정도의 연습기간을 거치지 않고 매수가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로 못 쓰는 거예요. 달인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달인이 돼야죠, 문학의 달인. 그런데 문장에 달인이란 건 없어요. 최고의 문장을 쓰는 사람들도 항상 좌절하니까. (그래서) 제 원칙은 이래요. 저는 어디에 제 이름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쓰고 500번을 검토한다, 이게 제 원칙 같은 겁니다. 이 전봉준도 500번 고친 거예요. 남들은 그냥 막 써서 갈긴 걸로 아는데,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달라요.

세 번째는 자기만의 색깔이에요. 이건 굳이 어렸을 때 ‘나만의 색깔을 가져야지.’ 하지 않아도 그 색깔은 나오게 돼요. 그 사람의 디엔에이, 특징에 따라서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관점은 나타날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색깔을 막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노력은 해줘야 되겠죠. 남이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게 아니고, ‘이건 내가 볼 때 이게 맞아’ 하는 것 말이죠.

○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썩 낭만적이지도 않고.

그렇죠. 사람은 다 자기 색깔이 있는 거니까. 그건 저절로 이루어지기도 하겠지만 훈련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죠.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되죠 그건.

○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해주시죠. 좋은 작가란 어떤 사람일까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문학은 패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문학적으로는 패배하고 좌절하고 전면에 자기를 드러내지 못한 채 그늘 속에서 스러진 사람들에게 대개 앵글이 가죠. 전봉준 같은 경우도 이름은 있지만 승리한 자가 아니잖아요. 자기 꿈을 위해서 몸으로 부딪쳤지만 결국은 깨져버린 그런 사람이죠. 문학은 아마 그런 기록일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 사회가 행복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한 그 지점을 들추고 그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한 그 지점을 들춰서, 아 우리사회가 이렇게 혼탁하구나, 이렇게 불행하구나라는 걸 독자들로 하여금 아프게 자각하게 만들고, 그런 자각을 통해서 독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의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는 그런 문학작품이 훌륭한 문학작품이 아닐까요? 자기의 삶의 태도에 개입하고 내가 살아가는 태도에 개입하고 나의 삶의 방식에 딴지를 걸고,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그런 메시지를 주는 문학, 저는 그런 문학을 지향하고 싶어요.

저는 한 개인의 내면만을 집요하게 얘기하는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김훈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 있잖아요? 『남한산성』은 우리나라가 청나라와 극한의 대치를 하고 수모를 당하고 하는 기록이 있지만 그 당대의 세상이 없어요. 그냥 한 사람의 아름다운 내면 풍경만 있어요. 그런 문학작품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새로 나오는 20대들의 작품에는 그런 경향이 점점 짙어져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