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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3 17:19:50

어머니와 딸 그리고 엄마이자 딸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37)] 설연화 / 시인·수필가


... 편집부 (2015-09-14 01: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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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면서도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보내버린 젊은 날의 삶을 아이들이 닮아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효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삼십 대 중반이 넘어선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마 계기가 된 것은 아버지께서 위암 판정을 받은 후였던 것 같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사랑보다 더 크게 자리 잡았던 나였기에, 부모라는 이름만으로 효도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망설임을 갖고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위암 선고는 그런 내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원망하고 있지만, 부모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부모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 있고, 이 가정을 꾸릴 수 있고, 내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효녀는 아니다. 내가 효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어머니의 말씀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요구에 아니라고 답을 못하는 소심한 성격일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바라보는 나는 효녀다. 아이들 상식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효녀다. 아니 효가 무엇인지에 대해 개념이 잡히지 않은 아이들이 바라봤을 때 나는 효녀였다. 이제 성인이 된 딸아이는 가끔 나를 향해 고개를 젓는다.
“엄마, 이건 아닌 것 같아. 왜 궂은일은 엄마가 도맡아서 하는데? 외숙모도 해야 하는 거잖아. 가까이 사는 것이 죄는 아니잖아? 딸이 죄인은 아니잖아? 외삼촌이 우리보다 더 잘 살잖아? 그런데 왜 엄마가 다 해야 하는데?”
“나중에 자영이가 결혼하면 알아. 왜 해야 하는지.”
“엄마는 외할머니처럼 안 하잖아? 난 당연히 엄마한테 받은 사랑만큼 엄마한테 되돌려 줘야 하는 것은 맞는 이야기고, 외할머니는 엄마한테 항상 딸은 출가외인이다. 딸은 자식이 아니라고 하시잖아.”
“그래도 부모님이시잖아. 할머니 없이 엄마가 있을 수 있을까? 엄마가 없는데 자영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
“그것만으로는 이해 안 돼! 부모랑 연 끊고 사는 사람들 많아. 내 친구 중에 몇 명은 취직하고 바로 집하고 연락 끊고 사는데? 외할머니가 애지중지했던 큰외삼촌도 연락 끊고 살잖아? 부모라고 다 같은 부모는 아니잖아.”
“우리 딸 무섭네? 나중에 엄마가 뭔가 잘못하면 자영이도 그럴 수 있겠네?”
“그건 아니지만…. 다만, 엄마 하는 것 보면 가끔 이건 아니지 싶어서 그래.”
딸아이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딸아이가 경험한 외할머니는 정이 있는 분도 아니고, 엄마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남긴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는 터였다.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였다. 아버지 생신 무렵에 오빠네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함께 고향을 내려갔다. 아이들 나이가 고만고만해서 서로 경쟁심도 강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였다. 오빠가 운전하는 차가 우리 차를 앞서가자 딸아이와 아들아이가 동시에 소리쳤다.
“아빠, 우리가 앞에 가야 해!”
남편과 나는 아이들 소리에 웃었다. 딸아이는 심통 난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남편을 째려봤다.
“준호가 그랬어. 우리 차는 고물이라고! 아니잖아! 그러니까 빨리 추월해 버려!”
“과속하면 위험해! 우리 천천히 가자.”
“그러면 준호 말이 맞는 것이 되잖아!”
남편은 운전도 교과서였다. 그저 조용히 뒤따라갈 뿐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시골집에는 먼저 들어갔다. 대문으로 차가 들어가자 어머니는 안방 문을 열어 확인하시더니 하던 일을 하고 계셨다. 딸아이가 안방 앞에 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응, 그려 왔냐? 오니라고 고생혔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때였다. 오빠 차가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마당으로 나가셨다. 아이들이 차 문을 열고 나오자 번쩍 안으며 온갖 사랑을 표현하셨다.
“오매 내 새끼 오니라고 고생혔지야? 오매 내 새끼 춥것네, 언능 들어 가자잉!”


(그림=임솔빈)

품에 안긴 조카는 딸아이에게 혀를 내밀었다. 딸아이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나 또한 화가 났다. 남편도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키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딸아이를 끌어안았다.
“할머니는 원래 그러셔. 자영이가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야.”
“준호만 좋아하잖아.”
“그런 것 아니야!”
남편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내가 남편을 바라보자 남편은 한숨을 내리 쉬었다.
“차라리 그냥 가자. 나도 좀 기분 나쁘다. 아무리 딸자식은 남의 자식이라 생각하는 분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자.”
그때 밖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신 모양이다. 그리고 딸아이를 가슴에 안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우리 자영이 추운디 왜 밖에 있었으까? 감기 걸리믄 우짤라고.”
아버지 생신 때문에 내려갔던 우리 가족은 가슴에 큰 멍울 하나를 새겼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큰오빠네 가족과 둘째 오빠네 가족이 내려왔다. 그러자 셋째 언니는 툴툴거리며 내 앞에 앉았다.
“어머니는 진짜 너무 하신 것 같아. 어떻게 큰아들네 오니까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아. 우리는 완전 찬밥이네?”
“우리 엄마 원래 그러신 것 알잖아. 언니. 아까 자영이 우는 것 안 봤어? 나 정말 그때 마음 같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갔어.”
“하긴 내가 다 민망하고 미안했으니까.”
딸아이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첫 번째 상처였다.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은 많았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받는 상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받는 상처보다 아이들이 받는 상처가 더 크게 다가왔다.
셋째 오빠네 큰아들인 준호가 항공회사에 입사했을 때, 어머니는 동네잔치라도 벌일 기세였다. 그러나 딸아이가 취직했다며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딱 한마디였다.
“그래, 잘혔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선전 맹그는 회사라고? 돈이나 모아서 시집이나 가믄 되것네. 잘혔다. 그란디 그란 걸로 인사 오고 그라냐? 뭔 대수라고. 누구는 대학 나와서 취직 못 허는 사람 있다냐?”
대학 들어갈 때도 그랬다.
“뭔 딸자식을 등록금도 비싼 4년대를 보낸다냐? 돈도 푸졌는갑다. 대충 전문대나 보내든가 공장이나 취직시켜서 시집갈 돈이나 벌믄 되제. 뭔 부귀영화를 보것다고…. 너도 가만 보믄 세상 헛살았시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악다구니를 썼다. 어차피 어머니의 사고는 그렇게 굳어진 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운함과 그동안 쌓였던 원망이 쏟아졌다.
“친손자가 대학 갔으면 엄마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왜요? 종손은 전문대도 겨우 들어갔는데 외손녀가 4년대 들어가니 속이 꼬여요? 그것도 꽤 알려진 대학 들어가니 화나요? 괜히 왔네요. 적어도 애 앞에서 축하는 해 주실 줄 알고 기대했던 제가 잘못이네요. 갈게요.”
그렇게 안방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내 손을 잡아당긴 것은 딸이었다. 나보다 더 상처가 컸을 딸이었다. 하지만 딸아이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를 작은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내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딸아이는 외할머니가 계시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엄마가 속상해서 그래요. 누구보다 할머니한테 칭찬받고 싶었는데, 할머니께서 인정 안 해주시는 것 같아서 속상했나 봐요. 할머니 이해하시죠?”
“너한티는 미안허다잉. 그려 잘혔다. 공부허느라고 고생했고잉. 내가 달래 그랬가니? 대학 4년 보낼라믄 지가 허리띠 졸라매야 댕께 그랬제. 거그다가 느그 동생도 대학 갈 꺼 아니여? 그람 대학을 두 명씩이나 보내야 허는디. 지 생각혀서 그란 것이고만 써글 년이 승질머리 드러워서 그라제 으째야.”
“할머니, 노여움 푸세요. 제가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이라도 받으면 엄마 고생 덜하시잖아요. 엄마는 조금 있으면 풀어지실 거예요. 아시잖아요. 엄마 원래 화내고 금방 후회하는 거. 지금 벌써 후회하고 계실 걸요?”
그랬다. 난 작은방에 들어와 앉자마자 내가 왜 화를 냈을까 후회하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원래 성격이, 사고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화를 내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딸아이가 웃으며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지금 후회하고 있지?”
“너 화나지 않아?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화내면 뭐해? 한, 두 번도 아닌데, 이제 화도 안 나. 원래 표현을 그렇게 하시는 분이잖아. 그리고 내가 화내고 기분 나빠하면 엄마가 더 속상하잖아. 지금도 또 상처받고 그 상처에 약 바르는 중이잖아. 자책하면서….”
내 성격상 화내고 나서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그것을 아시는 어머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작은방 문을 여시더니 딸아이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화해의 표현이셨다. 그리고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성질머리 하고는, 언능 저녁이나 묵자. 밥해라.”
“네….”
또 한 번의 상처는 그렇게 가슴에 쌓이고 있었다. 딸아이도 아들도 외할머니에 대한 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을 주지 않는 외할머니를 향해 정을 가지고 사랑으로 대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외면하지는 말라고 말할 뿐이었다.

작년이었다.
어머니께서 연초에 쓰러지신 이후 병원에서 사시는 날이 더 많았다. 나 또한 친정을 일주일에 한 번꼴로 다녀야 했다. 그때마다 딸아이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할머니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엄마도 엄마 생활이 있잖아. 일도 해야 하잖아? 학교 공부도 해야 하고, 서예도 해야 하는데 왜 할머니가 부르면 바쁘다고 못 하는데? 할머니 항상 그러시잖아? 딸은 자식도 아니라고. 그런데 왜 이럴 때만 자식이라는 건데?”
“나 아니면 시골집 갈 사람이 없잖아. 다 직장 다니고 있고….”
“엄마는 일 안 해? 하잖아? 재택근무도 엄연한 직업이야. 프리랜서도 직장인이라고! 난 이러는 엄마가 이해 안 돼!”
“이제 할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어. 돌아가시는 날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그건 할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야 자영아.”
“엄마, 차라리 그냥 나중에 후회해. 난 엄마가 그렇게 혼자 고생하는 것 싫다고. 왜 우리 엄마만 고생해야 하는데? 외삼촌들은 자식 아니야?”
“그냥 엄마 마음 편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주면 안 될까?”
“난 엄마처럼은 못할 것 같아. 나도 바쁜데 엄마가 고추 심자 와라. 그 한마디에 어떻게 두 말없이 내려갈 수 있어? 김장할 때도 엄마 혼자 다 하잖아?”
“그렇다고 매일 야간하고 아침에 들어오는 외숙모한테 하라고 할 순 없잖아?”
“그래도 날짜를 맞출 수는 있잖아.”
“외할머니 숨넘어가시는 것 들었잖아. 날씨 추워지면 배추 못쓰게 된다고…. 그거에 매일 걱정이신 분한테 한 달 뒤에 합시다. 소리를 어찌하느냐고!”
“그럼 외할머니가 좀 엄마한테 다정하게라도 대해 주든가. 지난겨울에 김장하러 가서 엄마 또 상처받고 왔잖아? 고생은 혼자 다 하고, 외할머니는 외숙모한테만 고생했다고 외숙모만 챙기고….”
“며느리니까 눈치 보시는 거야!”
“난 그것도 싫다고!”
“나중에 자영이도 시집가서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면 아마 이해하게 될 거야. 딸은 편해서 그냥 대하는 것이고, 며느리는 아무래도 잘해줘야 내 아들이 편할 테니까.”
“그건…. 그래도 엄마처럼은 못 해!”
“엄마처럼 하라는 것은 아니야. 다만 할머니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잖아. 만약에 할머니께 엄마가 왜 나만 시켜요? 그렇게 정성스럽게 키운 오빠들 많잖아? 딸은 남의 자식이라면서 나만 부르는데? 하면서 할머니한테 따지면 할머니 뭐라고 할 것 같아?”
“하하 그건 알아. 써글년 누가 시방 너한테 하라디야? 오지 말어라. 너 같은 년은 꼴도 보기 싫응께. 엠병 그거 쪼까하믄서 생색은! 그러시겠지. 뭐.”
“그래, 할머니께서 변하지는 않아. 어차피 변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할머니 마음 편하고, 엄마 마음 편한 쪽을 택하는 거야.”
“그래도….”
딸아이는 적잖은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다. 할머니가 미워서가 아니라, 친정에 다니는 바람에 하지 못한 일 밤새워 해야 하는 내 걱정에 잔소리가 많아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성인이 된 딸아이는 어느새 엄마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일이 많아졌다. 딸아이는 말끝마다 내가 엄마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물음표를 던지곤 한다.

딸아이는 애교가 많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쫑알거리며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 곁에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중년이 된 지금도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대답 이외에는 몇 마디 하지 않는다. 그나마 전화통화 할 때만 어머니와 대화를 조금 할 뿐이다.

딸아이를 보며 난 후회한다. 난 저 나이 때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에 스스로 지쳐 있었다. 사랑 주지 않는다고, 왜 차별받아야 하냐고.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원망은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고, 그 응어리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기에 다정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다만, 이제 사신다면 10년을 더 사실 것인지, 20년을 더 사실 것인지, 그다지 멀지 않은 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 그 응어리가 풀린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딸아이처럼 살가운 성격이었다면 어머니도 달라지셨을지도 모른다. 딸아이의 잔소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머니도 내가 종알종알 살갑게 구는 성격이었다면 조금 더 다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났다.
“엄마 왜?”
“아니 그냥, 내가 너처럼 그렇게 할머니한테 응석도 부리고, 어리광도 부리고 했다면 할머니는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이 들어서. 지금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만약 내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면 내 성격은 삐뚤어졌을 거야. 엄마처럼 못하지. 연락도 안 하고 살걸? 그리고 엄마가 어리광부릴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으셨잖아. 할머니께서. 어리광부리면 부지깽이부터 날아왔을 것 같아.”
“그럴지도….”

내 어머니는 친구들의 어머니와 많이 다르다. 어릴 때부터 다정다감한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친구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딸아이와 이해와 포용, 대화와 즐거움을 나눌 수는 있지만 다정다감한 엄마는 아니었다. 철없는 엄마지만, 살갑게 아이들을 끌어안고 호들갑스럽게 걱정하는 엄마도 아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엄마일 뿐이었다.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이들은 나와 다르다는 것. 살갑고 호들갑스럽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끌어안고 어리광부리는 아이들이 나를 닮지 않아 다행스럽다.

다시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 기도 삽관하고 인공호흡기에 생명을 의존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딸아이가 씩씩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또 나주 갔어?”
“응, 할머니께서 또 쓰러지셨어.”
“엄마 어제 한숨도 못 자고 일하다 아침에 전화받고 내려갔다며?”
“어쩔 수 없잖아.”
“서울 올라가기 전에 엄마 흰머리도 뽑아 주고, 염색도 해 주려고 왔는데….”
“상황보고 금방 올라갈게!”
“엄마도 할머니가 걱정돼서 내려가는 거지만, 나도 엄마가 걱정된다고! 나 없으면 또 일 년 내내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방에만 있을 거잖아. 그래서 엄마랑 같이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려고 왔는데….”
딸아이의 걱정과 투덜거림을 들으며 난 어머니께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걱정하듯 미래의 딸 또한 나를 걱정하고 나를 향해 달려올 것이라 믿으며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딸아이의 사랑하는 마음 가득 안고 가는 아프고도 행복한 길이었다.
어머니께는 딸이고, 딸에게는 엄마인 엄마와 딸 사이에 엄마와 딸. 딸아이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는 모른다. 내가 어머니께 하지 못한 효를 딸에게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편할 수 있고, 모두가 편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딸아이가 엄마와 딸 사이에 엄마와 딸이 되었을 때, 딸의 딸에게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라 좀 더 현명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운 모습은 닮지 않았으면 한다.

[작가 약력]
전남 나주 출생
전북 군산 거주
1995년~99년 소설창작모임 운영
2003년 수필집 [누룽지와 꺼먹고무신] 출간
2004년 월간 시사문단 시 등단
2004년 계간 대한문학세계 소설 등단
2011년 시집 [여백] 출간
2015년 현재
시낭송가
웹디자이너
홈페이지 : 설연화의 문학공간 (http://sichenji.com)

※ 설연화 작가의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을 연재 중입니다. 매주 월요일 새로운 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