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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4 21:47:42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38)] 설연화 / 시인·수필가


... 편집부 (2015-09-21 1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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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어찌 보면 엉뚱한 말일 수도 있다. 말은 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조금 전 누군가와 싸우고 중요한 약속이 있어 사람을 만났다면 바로 전에 싸웠던 사실을 잊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물론 사람이기에 대화 중간, 중간 화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마주 보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면 분명 싸웠던 일 또한 가슴 한편에 접어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아들아이는 공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시험기간은 일찍 끝나는 날이어서 좋았기에 공부와 친구들과 어울림 사이에서 갈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딸아이는 달랐다. 중학교 2학년쯤으로 기억한다. 한참 이성에 관심이 많은 나이여서 남자친구가 있었다. 중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남자아이였고, 다양한 분야에 재능이 있는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딸아이가 남자친구를 사귄 지 한 달 조금 지났을 무렵 중간고사가 있었다. 딸아이는 모범생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노력하며 상위권을 향해 도전하고 있었다. 시험기간이라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겠다던 딸아이가 일찍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 벌써 와? 시험공부 다 했어?”
“아니, 그냥 기분 나빠서 들어왔어.”
“무슨 일 있었어?”
“남자 친구랑 싸웠어!”
“응? 왜?”
“오늘 독서실로 그 애가 찾아온 거야. 그래서 내일 수학시험이라 공부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 쉬운 수학도 시험공부 하느냐고 하면서 노래방 가자고 하잖아. 엄마도 알잖아. 나 정말 수학 힘들어하는 것. 그런데 사람 무시하는 것처럼 그 쉬운 것도 시험공부 해야 하는 거냐고 하잖아. 그래서 자존심도 상하고 나도 잘하는 것처럼 말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노래방을 갔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그 애가 딱 한 시간만 놀고, 가서 시험공부 하라고는 하는데, 그 한 시간 동안 다른 친구들은 수학문제 몇 문제 더 풀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시험기간에 놀러 다니는 것 엄마가 용납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고 독서실로 갔어. 근데, 독서실 가서 책을 펼쳤는데, 도저히 수학문제가 풀리지 않아. 자꾸 내가 너무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그냥 와 버렸어.”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시험 기간에 노래방 가서 놀고 있는 아이를 잘했다고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공부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난 딸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심란해 하는 표정으로 식탁에 올려 준 떡볶이만 포크로 찍을 뿐 먹지는 않았다.

딸아이에게 음료수를 건네고 마주 보고 앉았다. 딸아이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 그냥 호기심으로 만든 남자친구가 아니라 조금은 진심이 담긴 처음 남자친구였기에 더욱 심란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친구한테 전화해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직 노래방에 있을 거야. 내가 독서실 간다고 하니까. 그냥 친구들 불러서 논다고 했거든.”
“그럼 지금 가서 놀고 와! 노래방에서 한 시간만.”
“응?”
“대신 딱 한 시간 동안만 시험에 관한 것은 잊어버려. 그냥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신 나게 스트레스 풀고 와. 지금 이 상태로라면 너 오늘 밤에 수학문제 한 문제도 못 풀고 내내 지금처럼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내일이 내가 가장 못 하는 수학시험인데 그게 가능하겠어?”
“가능해. 딱 한 시간만 놀겠다는 약속만 지키면 돼! 자 엄마가 허락했지? 시험은 내일이고, 아직 3시야. 그럼 오가는 시간 빼고 5시면 집에 들어올 수 있지? 간단하게 밥 먹고 6시부터 공부하면 적어도 6시간 정도는 공부할 수 있어. 어제도 시험공부 하고 새벽 2시에 잤잖아? 그런데 오늘은 12시에 잔다고 해도 6시간 공부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지금 상태라면 새벽 5시까지 공부해도 어떤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거야. 자. 지금 남자친구한테 연락해 봐. 그리고 노래방에서는 절대 시험공부 생각하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마. 그냥 신 나게 놀기만 해! 그리고 5시 안에 집에 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았지?”
“…. 응!”


(그림=임솔빈)

딸아이는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남자 친구와 연락이 되자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4시가 조금 넘자 활기차고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남자친구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모르는 척 내 방에서 컴퓨터를 만지고 있었다. 딸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 방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
“엄마 숨 안 넘어가. 항상 그 자리에 있잖아!”
“엄마! 역시 엄마 멋져!”
“뭐가?”
“있잖아. 노래방에서 놀다가 보니까 정말 시험공부 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도 안 났어. 우선 엄마가 허락했으니 먼저 안심이 됐었나 봐. 그래서 남자친구한테 사실 이야기를 했더니 막 웃는 거야. 사실 그 애도 그렇게 하는 거래. 시험 끝나면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신 나게 놀고 집에 들어가서 저녁 먹고 그때부터 집중해서 공부하면 정말 잘 된대!”
“그럼 이제 저녁 먹고 공부할 수 있겠네?”
“응!”
“그래, 어떤 일이든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내일 당장 시험 봐야 하는데, 모레 체육대회 걱정하면 시험은 망치겠지? 그리고 체육대회 하는 날은 시험 망쳤다고 심란해 하고 있으면 체육대회도 엉망 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그것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그다음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난 다음에 생각하면 되겠지?”
“엄마도 그렇게 해? 그래서 항상 새벽 늦게까지 집중해서 일하는 거야?”
“그런데 어른이 되면 좀 복잡해. 나도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저번에 컴퓨터 자격증 시험 볼 때, 외할아버지 위암 조직검사 결과 나오는 날이었잖아. 시험은 보고 있는데, 정말 까만 것은 글씨고, 하얀 것은 종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이해도 되지 않고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거든. 그래서 잊어버리자. 일단 시험 끝나고 생각하자 했지만, 워낙 큰일이다 보니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어. 그래도 항상 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은 해. 지금 엄마가 일은 일단 미루고 자영이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일보다 자영이가 우선이잖아? 모든 것은 우선순위가 있잖아.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도 되는 것. 그래서 항상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부터 결정하는 것이 중요해!”
“응! 엄마. 이제 나한테 가장 우선인 것은 시험공부 맞지? 그러니까 엄마 저녁 준비하는 동안 수학문제 풀게.”
“차분히 저녁 먹고 시작해도 되는데? 그래야 집중도 더 잘 될 거야.”
“아니야. 아빠 들어오시려면 시간 좀 있어야 하잖아. 엄마 말대로 시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잖아. 아빠랑 같이 밥 먹을 거야. 그러니까 시간이 좀 남아. 그때 몇 문제라도 풀어볼게.”

그렇게 딸아이는 우선순위를 정하기 시작했고, 시험기간에는 시험 끝나면 무조건 한, 두 시간 스트레스 해소한 후에 시험공부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내가 권했던 방법이라 무어라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딸아이는 그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학생 때는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공부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일이 우선이 아니라 상사가 시킨 일이 우선이 되고, 사람과의 갈등 속에서 많은 번민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딸아이가 취업한 후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사람과의 관계였다. 무엇보다 바로 직속상관인 대리와의 갈등은 딸아이의 건강까지 위협했다. 딸아이의 하소연은 매일 반복되었다.
“엄마, 그만둘 것이라고 마음먹고 나니까. 정말 일이 너무 싫어. 대리 얼굴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싫고, 매일 숫자를 적어야 하는 것도 너무 싫어.”
“하지만 자영아. 사람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네가 그만두고 난 뒤, 네가 광고업 쪽에서 계속 일을 한다면 그 사람들과 또 마주쳐야 할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잖아? 아니, 그 관련 업종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연이든, 악연이든 어떤 상황에 어떻게 마주치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마지막까지 너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야. 그래서 유종의 미라는 말이 있잖아?”
“응, 그래서 지겨운 것 숨기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일주일 남았는데 오늘도 밤샘작업 해야 하잖아. 그래서 더 지겨운 것 같아. 그래도 지금은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야겠지?”
“당연하지. 엄마 딸이잖아. 넌, 할 수 있어. 조금만 참고 노력해 봐.”
“지금은 대부분 퇴근하고, 나하고 다른 팀 대리 언니랑 둘이 밤샘작업 해. 그 언니는 당장 내일 미팅할 자료 정리 중이고, 난 온라인 광고 마지막 점검 중이야. 우리 사수는 정각 7시에 퇴근했어. 그나마 다행이지 뭐.”
“그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야. 알았지? 그다음에 쉬자!”
“응!”
딸아이는 인수인계가 끝나는 날까지 밤샘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서울살이의 종지부를 찍는 줄 알았다. 아니 끝이라고 생각하고 서울에 구했던 원룸도 정리하고, 서울에서 만난 인연도 대부분 작별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지금. 기획국장의 전화를 딸아이는 매일 받고 있다.
“자영이 언제쯤 올라올 거야? 자영이가 온다면 난 천군만마를 얻는 것인데, 자영이 만큼 성실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요즘에 흔하지 않아. 난 자영이가 하루라도 빨리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달 안에는 올 거지?”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군산에 있는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전화를 받은 딸아이가 내가 들을 수 있게 설정하고 통화를 했기에 국장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전화를 끊은 딸아이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의 가르침 덕이옵니다. 어마마마!”
“뭔 소리야?”
“만약 내가 너무 힘들어하면서 마지막을 대충하고 싶고, 얼른 끝내고 싶어 할 때, 엄마도 화가 나서 대충하지 뭘 그렇게 끝날 때까지 밤샘하느냐고 거들었다면 난 아마 대충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엄마가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며 나에게 용기를 줬잖아. 저 사람들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고. 그 결과가 지금 상황인 것 같아서.”
“그 힘든 생활 다시 하라는데 좋아?”
“물론 힘든 것은 알아. 그래도 지금은 한 번 경험해 봤으니까. 어느 정도 힘들다는 것은 알게 되었잖아. 그리고 노는 것보다는 낫지. 대학 동기들, 후배들 보니까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연봉 받으면서 일하더라고. 내가 힘들게 일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쉬면서 보니까 너무 피부로 와 닿아. 그래서 한 번 더 도전해 보려고. 엄마가 응원해줄 거잖아!”
“당연히. 우리 딸은 잘할 수 있을 테니까. 자 6개월 동안 노는 것도 최선을 다해서 놀았으니, 이제 직장 생활도 최선을 다해야겠지?”
“네! 어마마마!”
“또 까분다.”
딸아이의 맑은 웃음을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준다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은 드물 것이다. 딸아이의 성실함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눈여겨 지켜봐 준 기획국장의 안목도 감사할 일이었다.

살아가면서 좀 더 쉽게 살 수 있는 것에 유혹을 받는다. 내가 돈에 관심이 많다면 좀 더 편하게 일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땀 흘린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면 모두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했을 때는 그 일의 결과가 어찌 되었든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면서 살아간다. 다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시간 낭비일 것도 같고, 대충 한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조금은 꾀를 부리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누가 뭐라 한다 해도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살았으면 한다. 내일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오늘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한다면 살아있는 평생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테니 말이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자리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했는지, 내가 만나는 사람 그 누군가에게 진솔함의 최선을 다했는지 가끔은 돌아보며 살아 볼 일인 것 같다.

[작가 약력]
전남 나주 출생
전북 군산 거주
1995년~99년 소설창작모임 운영
2003년 수필집 [누룽지와 꺼먹고무신] 출간
2004년 월간 시사문단 시 등단
2004년 계간 대한문학세계 소설 등단
2011년 시집 [여백] 출간
2015년 현재
시낭송가
웹디자이너
홈페이지 : 설연화의 문학공간 (http://sichenji.com)

※ 설연화 작가의 [사고뭉치 엄마의 괴짜 교육법]은 40화(10월 5일)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