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전북지부가 대량 구매한 이석기 저서…그는 과연 양심수인가

공유
기사 대표 이미지

【전북교육신문】전교조 전북지부의 ‘이석기 저서 40권 구매’와 사면·복권 서명 독려를 다시 묻는다
평화를 말하는 교사라면 군복을 입은 자신의 제자부터 떠올려야 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북지부는 2021년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저서를 정세교육 자료로 40권 구입했다. 이후 당시 전교조 전북지부장은 이석기 전 의원의 사면과 복권을 위한 서명에 동참하도록 독려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가해자’, 이석기 전 의원을 ‘피해자’라고 표현했다.

책 40권의 구매, 사면·복권 서명 독려, 그리고 ‘피해자’라는 규정까지. 이 장면들은 서로 완전히 별개의 일로 보기 어렵다. 이석기를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은 정치적 피해자로 다시 바라보려는 하나의 흐름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석기를 아무런 설명 없이 진보의 상징이나 양심수로 규정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는 전쟁 상황을 전제하고 폭력적 실행행위를 논의하고 선동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인물이다. 그의 언행을 단순히 ‘국가보안법 피해’라는 말 하나로 덮을 수는 없다.

대법원은 2015년, 이석기에 대해 내란선동 유죄를 확정했다. 당시 회합에서 이석기가 전쟁 발발 상황을 상정하고 국가기간시설 파괴 등 구체적 실행행위를 촉구한 발언에 대해 법원은 참석자들의 내란 결의를 유발하거나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진보라면 내란선동이 아니라 전쟁반대를 조직했어야 했다

핵심은 단순히 죄명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 발언이 전제했던 폭력의 방향을 봐야 한다. 전쟁 상황을 상정해 철도와 통신, 전력 등 국가기간시설의 파괴와 마비를 논의하는 것은 반전운동이 아니다. 반전운동은 전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쟁이 닥쳤을 때 무엇을 파괴하고 누가 이를 실행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순간, 평화의 언어는 전쟁의 언어로 바뀐다.

국가기간시설은 추상적인 국가권력의 상징물이 아니다. 전력이 끊기면 병원의 생명유지 장비가 멈출 수 있다. 통신이 두절되면 재난과 전쟁 상황에서 시민들이 고립된다. 철도와 에너지 공급이 마비되면 노동자와 자영업자, 환자와 어린이 등 평범한 시민의 일상이 가장 먼저 무너진다.

그리고 그 시설을 지키기 위해 현장에 나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정치인도, 운동권 지도자도 아니다. 징집돼 군복을 입은 평범한 청년들이다. 더구나 그 청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익명의 군인이 아니다. 교사들이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며, 지금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몇 년 뒤 마주할 수도 있는 현실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발전소와 철도, 통신시설 등 국가기간시설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 역시 그런 청년들이다. 국가기간시설을 파괴하거나 마비시키는 실행행위를 상정한다는 것은 결국 그 시설을 지키기 위해 투입된 청년들과 충돌하는 상황까지 전제하는 것이다.

시설 파괴를 실행행위로 상정한 발상은 결국 교사들이 가르친 제자들을 죽고 죽이는 자리로 밀어넣는 문제와도 분리해서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단체라면 이 문제를 더욱 무겁게 바라봐야 한다.

평화와 인권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군복을 입은 청년 역시 자신의 제자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구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이 전쟁터에 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을 막는 것이어야 한다.

진보라면 청년의 곁에 서야 한다. 총구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 총구 앞에 어떤 청년이 서게 되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는 침묵하면서 미국의 군사 행동에만 반대하거나,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는 반대하면서 정작 국내 청년과 시민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폭력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면 그것을 일관된 평화주의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이석기 평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사상과 표현을 형사처벌하는 국가의 권한은 민주사회에서 최대한 제한돼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오랜 기간 정치적 반대자와 소수 의견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비판 역시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과 이석기 전 의원의 모든 언행을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대법원에서 내란선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아무런 설명 없이 ‘양심수’라고 부르는 순간, 그 표현은 더 이상 보편적인 양심의 언어라기보다 특정 진영의 정치적 언어가 될 수 있다.

물론 국가보안법 적용의 정당성을 비판할 수 있다. 내란선동죄의 적용 범위와 형량이 적절했는지를 논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과 별개로 법원이 인정한 폭력 선동의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석기의 당시 언행까지 진보적이었다고 평가하거나, 별다른 설명 없이 그를 양심수로 규정해야 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전교조 전북지부가 이석기 전 의원의 저서를 40권 구매한 일 역시 단순한 개인의 독서 취향과는 성격이 다르다. 조직의 정세교육 자료로 다량의 책을 구입했다면 그 선택이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구성원들에게 전달하려 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검증이 필요하다. 이후 당시 지부장이 사면·복권 서명을 독려하면서 이석기를 ‘피해자’로 표현한 것은 그 방향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사면을 요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누구든 사면과 복권을 요구할 자유가 있다.

쟁점은 그 주장에 깔린 전제가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이석기를 박근혜 정부의 일방적인 탄압에 희생된 피해자로만 규정하는 순간, 전쟁을 전제로 국가기간시설 파괴 등 실행행위를 촉구했던 그의 발언에 대한 정치적·윤리적 평가는 사라진다.

교사의 제자들이 군복을 입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사는 미래의 시민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전교조 역시 노동과 인권, 평화와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중요한 가치로 내세워 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특히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군복을 입고 국가기간시설을 지켜야 할 남한의 청년들은 바로 오늘 교실에서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며, 이미 학교를 졸업한 제자들이다. 교사가 평화를 말한다면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사람 역시 그 제자들이어야 한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어느 날 군복을 입고 발전소와 철도, 통신시설을 지키다가 누군가의 파괴행위와 맞서게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진보와 평화의 기준은 바로 이런 구체적인 사람의 생명 앞에서 검증돼야 한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어느 한쪽의 군사적 위협에는 눈감고 상대 진영의 군사행동만 비판해서는 안 된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폭력 선동의 정당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라는 말 역시 전쟁 상황에서 폭력적 실행행위를 촉구한 인물을 아무런 비판 없이 영웅시하는 데 사용돼서는 안 된다.

이석기는 진보가 아니다. 양심수도 아니다. 전쟁 위험을 앞에 두고 남한의 군인과 시민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폭력적 실행행위를 논의하고 선동한 사람을 지도자로 추항하고 따르는 집단은 비판받아야 한다. 특히 그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바로 교사들이 가르친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교원단체라면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진보의 기준은 북한에 친화적인지, 미국에 비판적인지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그리고 시민의 생명을 어느 진영에 속했든 같은 잣대로 지키는 데 있다. 그 시민 가운데에는 교사가 가르친 제자들도 있다. 이 기준을 잃는 순간, 진보는 더 이상 진보일 수 없다.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