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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쓰러진 취꽃, 백남기 선생

[홍순천의 ‘땅 다지기’⑥]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10-05 20: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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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알밤을 주우러 산골짜기에 들어서면 찬이슬이 발끝에 젖어든다. 향기로운 버섯이라도 만날 욕심으로 가을 산을 배회하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새벽이면 손전등을 들고 산마루를 반짝거리는 약초꾼들이 분주한 한로(寒露) 무렵이다.

버섯을 탐해 골짜기에 들어섰지만 유독 눈에 띄는 꽃이 있다. 취꽃이다. 취나물은 봄철 입맛을 제대로 돋우는 음식이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취나물은 겨우내 움츠린 민중에게 활기를 제공해주는 귀한 존재다. 향은 물론 영양 면에서도 나무랄 데 없다. 그래서 취는 봄내 시달린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취나물은 이 무렵에 별처럼 환한 꽃을 피운다. 달빛이라도 비추이는 밤에 보는 취꽃은 땅에 쏟아진 별처럼 찬란하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잠시다. 잎보다 꽃대를 더 높이 키워 올린 취는, 꽃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고개를 숙이다가 이내 쓰러지고 만다. 안타까운 마음에 꽃대를 세우려 추슬러 보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풀들에게는 나름대로 종족을 퍼뜨리기 위한 전략이 있다. 바람에 씨를 날리는 풀은 꽃대를 최대한 높이 올려도 꽃대를 꺾지 않는다. 바람에 실어 멀리멀리 후손을 퍼뜨리자는 전략이다. 혹은 씨를 감추기도, 개미에게 내어주기도 하지만 다들 내년 봄을 준비하는 전략이다. 취꽃이 쓰러진 이유는 내년 봄이 되어서나 알 수 있다. 꽃대가 쓰러진 그 자리에서 감당 할 수 없을 만큼의 새싹이 올라와 민중을 먹이는 취나물로 돋아 오를 것이다. 취꽃이 쓰러지면 쓰러질수록 세상은 온통, 별처럼 빛나는 취꽃으로 가득하리라. 자기 몸을 살라서 자식을 지키는 부모의 마음이다. 박정희에게 저항하다가 그 딸의 물대포에 맞아 죽은 취꽃 한그루가 땅으로 돌아갔다. 지난했던 열 달 간의 무의식을 지키는 동안 씨는 여물어 갔고, 이젠 그 씨앗들이 싹을 틔울 일만 남았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고춧대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고추잠자리를 만난다. 그 날개 그물을 들여다보면 잠자리채를 들고 도둑걸음을 옮기는 유년을 만날 수 있다. 뒤꿈치를 한껏 돋우어도 닿을 수 없는 바지랑대 위의 잠자리가 꿈속에서도 억울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가을 한 낮이 넉넉한 추억거리가 된다. 잠자리 날개를 눈앞에 대고 모자이크된 세상을 바라보며 그중에 어느 것을 내 것으로 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손 안에는 부서진 잠자리 날개만 남아 있곤 했다. 달이 장하신 밤, 물가에 나가 반딧불이를 원 없이 잡아 호박꽃에 넣고 끝을 오므리면 누이의 볼처럼 발그레한 ‘호박등’이 완성되었다. 호박등을 손에 들고 술래잡기라도 하면 가로등이 없는 밤길도 동화 속처럼 포근했다. 지금은 그저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얘기다. 아름다운 것을 잃어버려 서글픈 비만 추적이는 가을이다. 잠자리 날개처럼 부서진 ‘사랑과 희망의 열정’을 위한 눈물이리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숱하게 유린해도 세상은 아직 그 건강함을 잃지 않았다. 숱한 풀들이 그렇듯이, 그 삶의 얼개를 사람들이 모두 통제하고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눈을 돌려 주변을 바라봐야 할 때다. 가을이 깊어 봄을 준비하는 온갖 생명의 자리에 눈길을 주어야 비로소 생명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우리와 아이들이 누릴 생명의 잔치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삶의 터전을 건전하게 유지해야 앞으로 오실 아이들의 꿈과 추억이 짓밟히지 않겠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를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김남주 시『옛 마을을 지나며』)이 우리 가슴에 있다. 긴 겨울동안 생명을 보듬고 아우르는 천지의 마음이 살아 움트는 봄을 위해 끊임없이 생동하리라. 취꽃이 피었다.


▲쓰러져서 별이 된 취꽃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 [편집자] [홍순천의 ‘땅 다지기’]는 격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