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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5-03 23:56:42

<전북교육신문이 만난 사람>-전북 무형문화재 고법 보유자 이상호


... 이병재 (2024-04-03 0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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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이상호. 판소리 대회 학생부에서 1등을 했다. 자신보다 잘하는 학생이 있었다. 지금 표현으로 ‘아빠 찬스’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러웠다. 이후 소리 대신 고법을 택했다. 30여 년이 흐른 지난해 말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장단(고법) 보유자가 됐다. 전주 덕진공원 앞 커피전문점에서 만났다.

▲ ‘바른 소리’ 이상호

국악계에서 ‘입바른’ 소리로 유명한 이상호(53) 씨는 고 이성근(1936~2019)명고의 막내아들이다. 이성근 명고는 소리꾼 출신으로 소리의 내용과 속을 잘 아는 ‘깊이 있는’ 고수로 평가를 받으며 1992년 전북 무형문화재 고법 보유자가 됐다.
아버지는 스물한 살 때부터 전주에서 김동준에게 소리를 배웠다. 이후 박록주, 박봉술, 강도근 등 당대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익혔던 아버지는 ‘소년 명창’이라는 칭송도 들었다. 하지만 소리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치과 치료받으면서는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

“아버지는 판소리를 하시길 원하셨어요. 아버지가 소리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으셨기 때문에, 이제 아버님은 틀니 때문에 이제 소리를 못 하셨고, 발음이 안 되고, 어릴 때 소년 명창 말도 듣고 그러셨는데…”

그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생각하였을 때는 중학생이 되고서였다. 서양음악을 하는 형제는 있었지만, 국악을 하는 형제는 없었다. 막내였던 그는 자신이 잇기로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뜻을 밝혔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국악인으로서의 힘든 길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하지만 결국 2학년 때 정식으로 허락받았다.
아버지의 희망대로 소리꾼의 길을 가려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판소리 대회 학생부에 출전한 그는 생각지도 않게 1등을 차지했다.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너무 부끄러웠다. 더구나 생각하기에 자신보다 더 소리를 잘했던 참가자도 있었다. 수상을 거부하자 심사위원들이 숙소까지 찾아왔다.

“고3 때 대회를 판소리 대회를 나갔는데 제가 학생부 1등 상을 탔어요. 근데 저는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제가 소리를 못 했거든요. 저보다 더 잘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게 아버지 후광으로, 저는 그게 너무 싫었던 거예요. 그래서 고3 때 아버지 몰래 고법으로 바꿔버렸어요. 대학교 딱 붙고 나서 ”아버지 저 사실은 고법으로 대학교 시험 봤어요”라고 말씀드렸어요. 떨어졌더라면 저는 아마 집에서 쫓겨났을 거예요.”

주위에서는 그가 당시 1등이라 생각했던 학생은 이후 소리를 그만뒀다고 전한다.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은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 친구에게 더욱더 미안할 것 같아서.
그가 스스로 힘든 길인 줄 알면서도 국악계의 ‘심사 비리’ 등 잘못된 관습을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악계가 정치권 등 외부에 휘둘리는 듯한 모습에도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저는 예술인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정치할 사람은 정치만 하세요. (정치권으로부터) 물론 도움을 받을 수는 있어요. 근데 정치판으로 너무 휩싸이면 정말 그건 보기 싫어요. 거기에 너무 편중돼서 예술계를 흔들어버리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정말 힘들어요. 특히 (정치를) 아예 못 하는 사람들은 그냥 묻혀버려요. 올곧게 예술만 하는 사람들이 설 자리들이 없어져 버리고 엉뚱한 사람들이 계속 힘을 얻어요”

▲ 소리와 고법

고법은 그에게 ‘오묘’한 대상이다. 정형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법의 세계는 깊고 넓다. 소리와 같이 고법에도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같은 소리라도 항상 같지는 않다. 똑같은 유파, 똑같은 바디인데도 소리꾼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나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지고 고법도 달라진다.

“소리꾼이 원하는 북이 뭘까? 내가 치는 북이 과연 정답일까? 평조, 우조, 계면조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내가 타법을 쳐야 할까? 지금도 공부 중이지만 소리꾼마다 이게 톤이 달라요. 공연장에 오신 방청객들의 반응도 살펴야 해요. 고수는 저 잘났다고 북가락을 치면 안 돼요. 소리꾼이 조금 부족하면 소리꾼을 살리고, 또 고수가 부족하면 소리꾼이 살려주고. 호응이 중요해요”

소리꾼마다, 고수마다 저마다 특성이 다르다. 또 같은 소리꾼, 고수도 공연마다 매번 똑같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때그때 작은 변화에 잘 대응해서 관객들에게 수준 높은 무대를 보여주기 위한 가장 철저한 준비는 충분한 연습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연습 시간을 충분히 보장 못하는 소리꾼하고는 공연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공연하기 전 최소한 다섯 차례 이상의 연습은 관객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저는 연습을 매우 중요시해요. 내가 아는 소리지만 그날 상황, 컨디션에 따라서 이게 너무 달라지거든요. ‘나도 알아’ 하면서 그냥 무대에 올라가 버리면 대번에 ‘티’가 나요. 저도 실수는 해요. 그래도 그걸 최소치로 줄이기 위해서 연습합니다. 딱 한 번 맞춰보고 어떻게 무대 올라가요?”

▲ 고수의 길

그에게 고수의 가장 바람직한 길은 ‘공부’다. 자신에게도,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공부해라”라고 주문한다. 자신도 아버지에게 고법을 배웠지만, 맹목적인 답습을 경계한다.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고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른 훌륭한 선생님들의 고법은 물론 동년배의 공연에서도 배울 점을 찾으라고 권한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됐다고 자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평가는 본인이 하는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관객이나 예술인이 하는 것’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게 최선인가 다른 건 없나, 내가 이렇게 쳤을 때 소리꾼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끊임없이 듣고 그 부분을 쳐보면서 소리꾼한테 방해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소리와 어우러질까?’ 항상 끊임없이 노력해라. 나는 지금까지 몇십 년 해오면서 추구하는 예술 방향인데 ‘이거 말고 다른 게 있다’라고 생각해. 너희들의 예술 세계를 찾아, 예술관을 찾아, 내가 정답은 아니야.”

그는 요즘 고법 채보에 관심이 많다. 전 바탕을 유파별로 채보하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명 고수 3인방'으로 불리던 김동준, 김명환, 김득수 명고의 가락 특징들을 정리해서 조금 더 부각하게 시킬 계획이다. 또 고법을 배우는 일반인들을 위해서도 기호 등을 정리해 보급하고 싶어 한다. 도립국악원 교수로 있으면서 강의한 내용을 일단 가락 위주로 채보를 마쳤다. 고수가 아닌 국악계 선생님들로부터 보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는 평도 받았다.

“전 바탕을 유파별로 저는 채보를 하고 싶어요. 그냥 딱 보고 이렇게도 치고 이렇게도 칠 수 있겠구나. 유파별로 제가 바라보는 시각으로 채보하고 싶어요. 이상호가 생각하는 춘향가, 이상호는 춘향가 이 대목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고민이 많았다. 아직도 개선이 요원한 ‘심사’ 등 고질적인 문제에서부터 외부의 힘에 의존해 내부를 흔드는 일부 인사들의 일탈, 그리고 다섯 바탕을 올곧게 이어갈 소리꾼의 부족 등 국악계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여러 요인에 대해 위험수위를 넘나들며 털어놨다. 스스로 ‘이단아’를 자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북 무형문화재 고법 보유자 이상호 <약력>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한국음악학과 졸업
현)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 고법반 교수
전) 국립창극단 지정고수,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제12회 팔마전국고수대회 대명고수부 대통령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