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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 깊은 밤

[홍순천의 ‘땅 다지기’⑭]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12-14 23:4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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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새벽을 밝히는 반달이 산 위에 걸쳐있다. 서쪽에서 해가 뜨는 듯 구름이 달을 감싸는 낯선 풍경이다. 바람은 차지만 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어둠은 빛을 품고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남쪽으로 피난 가는 태양도 머지않아 여정을 돌려 북쪽으로 향할 시절이다. 겨울이 깊으니 봄이 멀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커진다.

올해 동지는 음력으로 11월 23일이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았던 어르신들은 중동지나 노동지에는 어김없이 팥죽을 만들어 부엌이나 장독대에 먼저 드리며 내년 한 해의 액운을 막으려 하셨다. 붉은 팥죽은 벽사(辟邪)를 바라는 소박한 제사였다. 아버지와 함께 장터에 나가 맛보았던 단팥죽과는 달리 단맛이 덜하지만 동글동글한 새알심을 불어가며 먹던 담백한 어머니의 동지팥죽이 그립다. 올해는 노동지이니 팥죽을 쒀야겠다. 밀린 일기를 쓰듯 나이 들수록 헝클어진 감정의 실타래가 많아진다. 깔끔하게 숙제를 마치고 냇가에 멱 감으러 가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젠 꿈속처럼 느껴진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은 영화 제작자다. 그가 우리에게 내민 영화들은 아름다운 영상과 더불어 심각한 문제의식을 던져, 늘 예사롭지 않다.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던 세상일에 심각한 고민거리를 내민다. 그의 철학을 드러내는 일이다. 천재적인 재능에 노력을 더한 그의 작품들은 때론 어설프기도 하지만 여전히 심각하고 진중하다. 볼 수 있는 사람만 보라는 듯하다. 동짓달 깊은 밤에 그의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Exodus : Gods and Kings, 2014)을 다시 보았다. 홍해를 갈라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을 탈출시킨 모세의 이야기다. 성경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지만 성경의 기술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리들리 스콧의 눈으로 재해석했지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여전히 뛰어난 영상미는 관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 먼저 어린이로 등장하는 신의 모습이다. 광야로 쫓겨나 살다가 ‘신의 산’에 가서 만난 신은 무의식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이로 등장하는 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열 가지 재앙이 이집트를 덮치는 상황에서도 ‘내가 신이다’고 외치는 왕의 무모한 사고방식과 대비된다. 신은 끊임없이 자유의지를 강요한다. 절대권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어린이의 눈높이가 신의 눈높이일 수도 있다. 끝까지 욕심을 포기할 수 없었던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하다가 그 탐욕스런 생을 스스로 홍해에 수장시킨다. ‘리들리 스콧의 엑소더스’는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스스로를 신으로 임명한 권력이 맞이할 결과를 보는 듯해서 통쾌하다.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생활에서 구해낸 모세는, 다분히 영웅적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늘 고민하는 지질한 내 일상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희망이 보인다. 고민하는 지질한 일상이 역사다. 행복하게 살 일이다. 이 영화는 행복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 저항해야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결국 양심에 기반한 자기반성이 먼저라는 원론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밖에 없지만 어쩔 수 없다.

홍해를 건너기 직전 낮아진 바닷물을 건너자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은 저항한다. 우리는 이제 노예가 아니니 명령하지 말라고...... 모세는 이렇게 얘기한다. 여기 남아 있는다면 다시 노예가 될 것이라고. 기적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를 쟁취했다. 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동짓달 밤이 길다. 팥을 사야 동지죽을 끓일 수 있겠다. 팥농사를 소홀히 한 것이 후회되는 동지 무렵이다.


▲동지가 가까워도 잡초는 살아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