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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보름 쇠기

[홍순천의 ‘땅 다지기’(18)]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7-02-08 14: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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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새벽까지 마당이 훤하다. 보름이 다된 달이 온밤을 지키는 까닭이다. 삭풍에 몸을 움츠린 숲은 아직도 눈을 덮고 있지만 햇살에서 감지되는 봄을 기꺼워하는 표정이다. 한해를 시작하는 절기 대보름이다. 대보름이 지나면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한 해 농사를 준비한다. 어른들은 마음이 분주해지고 아이들은 신나는 놀이에 들뜨는 시절이다.

전에는 대보름달을 맞이하기 위해 집집마다 오곡밥을 지었다. 겨우내 간수해 두었던 묵나물을 무쳐 부뚜막에 함께 둔 오곡밥은 동네 개구쟁이들의 표적이었다. 열 집 이상의 찬과 밥을 섞어 먹어야 한 해를 건강하게 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남의 집 부뚜막을 탐하던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부엌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도 어른들은 짐짓 못들은 척 헛기침만 했다.

대보름 전날이면 이곳 산골마을 청년들도 분주하다. 달집을 만들기 위해 부역을 해야 한다. 청년이라고 해야 대부분 육십을 넘겨 흰머리를 날린다. 젊어봐야 육십이 가까운 사람들이다. 귀밝이술을 미리 챙겨 달집을 만들며 지난겨울과 봄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 시절의 액운과 아픔을 달집과 함께 태워버리자는 속셈이다. 달집태우기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행해지는 놀이지만 올해는 가축들의 질병이 심해 확산을 막자는 의미로 이마저도 금하는 곳이 많은 모양이다. 여러모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보름날 아침에는 부럼을 깬다. 일 년 내내 부스럼이 생기지 말라고 하는 일이다. 장독대에 두었던 청주로 귀밝이술을 마시고 찬 오곡밥에 나물을 먹으며 풍년을 기원했다. 하루 종일 마을을 돌며 더위를 팔고, 귀밝이술에 취해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개들에겐 서글픈 날이기도 했다. 보름날 해가 있을 때는 개에게 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개 보름 쇠기'다. 달이 떠오르고 나서야 밥을 챙겨주는 이 풍속은 다 개를 위해서다. 보름날 낮에 밥을 주면 개에게 파리가 끓고 몸에 진드기가 많이 낀다는 속설을 믿는 탓이다. 집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도 소홀히 하지 않는 배려가 느껴지는 일이다. 하지만 '개 보름 쇠듯 한다'는 속담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지내는 형편이라는 서글픈 얘기다.

달이 떠오르면 달집을 태우며 새해 소망을 빌었다. 나이 수만큼 매듭을 지어 볏짚을 태우고, 쥐불놀이가 당당하게 허용된 아이들의 신명이 달보다 더 밝았다. 어른들은 가축들의 더위를 막을 생각으로 왼새끼를 꼬아 소나 돼지의 목에 걸어주었다.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 둥글게 말아 걸어주기도 했다. 특히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는 악귀를 쫓고 더위를 막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달빛이 희면 많은 비가 내리고, 붉으면 가뭄이 들며, 진하면 풍년이 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 해 농사를 점쳤다. 농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문화다. 요즘은 많이 사라진 어린 시절의 대보름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달집을 태우며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는 정도로도 감지덕지다.

올해는 대보름맞이가 신명나지 않는다. '개 보름 쇠듯' 처량하고 서글픈 세상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어서 어서 벚꽃이 피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개 한 마리에게도 마음을 쏟던 어른들의 배려를 자양으로 커온 사람들에게는, 부조리와 후안무치로 가득한 이 세상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가슴이 답답하다. 개 보름 쇠듯 쓸쓸하지만 미래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하자는 가르침으로 알고 참아내야겠다. 개만도 못한 대접에 입맛이 쓰다.

대보름에는 과일나무 가지에 돌을 올려놓고, 옷을 만들어 입혀 시집을 보냈다. 생명을 품고 다산을 기원하는 일이다. 개 보름 쇠듯 하지만 돌멩이 하나 들어 대추나무를 시집보내야겠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달집태우기는 액을 사르고 생명을 키우는 놀이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