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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은 숙제다

[홍순천의 ‘땅 다지기’(21)]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7-03-13 12: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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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봄, 바람이 분다. 대통령을 탄핵시킨 헌재보다 더 엄정한 봄바람이 분다. 봄바람은 지난 가을에 미처 떨치지 못한 나뭇잎을 날리고 죽은 가지를 부러뜨리느라 분주하다. 봄이 오셨나보다. 냉잇국을 맛보려 호미를 들고 나선 손이 민망하도록 바람이 세다. 봄엔 왜 바람이 많이 불까?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혹독한 겨울바람보다 더 냉정하게 산을 흔든다.

바람은 숨결이다. 바람은 희망이다. 봄바람이 불면 여인들의 속치마가 부풀고, 봄바람이 불면 화들짝 피어나는 꽃들이 향기로운 잔치를 벌인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는 봄바람을 타고 세상 구석구석에 귓속말을 전한다. 가공된 목소리는 미처 알리지 못해도 민낯으로, 날것으로 날아오는 바람은 기어이 봄을 깨운다.

봄은 왔다. 바람만 불어도 봄이 온 것을 알겠다. 바람이 불어서 봄이 왔을까? 아니면 봄이 와서 바람이 부는 것일까? 풍정화유락(風靜花猶落), 조명산갱유(鳥鳴山更幽), 천공백운효(天共白雲曉), 수화명월류(水和明月流). 독파릉엄(讀罷楞嚴)이라는 제목으로 쓴 서산대사(休靜 1520~1604)의 시다. 바람이 멎자 오히려 꽃이 지고, 새가 운 뒤에 산이 더 그윽하다. 구름과 어울려 하늘이 더 밝고, 강물은 달을 품어야 흐르는 것을 알겠다는 내용이다. 바람이 불어서 꽃이 진 것이 아니라 제 할일을 다 하고야 스스로 꽃잎을 떨어뜨린다는 얘기다. 산도, 하늘도 강도, 그들의 존재 가치를 더욱 크게 하는 것은 상대방이라는 말씀이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미약한 민중의 힘이 오래된 적폐를 거부했다. 지긋지긋한 종양처럼 불편하고 껄끄러운 옷을 내던졌다. 속살을 드러내고 맨몸으로 봄바람을 맞이하고 싶은 탓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직 대통령은 꽃잎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약물과 권력에 의존해서 청춘을 유지하고 싶은 속셈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한다. 더 부끄럽지 않고 싶다면 지금 용서를 구해야한다. 이건 내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다.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애기다. 사실 전직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솔직한 말이지 지금 이 형편은 모두 우리가 만든 것이다. 맑은 하늘을 가리는 구름은 적도 동지도 아니다. 적당하게 균형을 이루고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최선의 역할이다.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일이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볼 일이다.

초당영백(草堂詠柏) 월원부유망(月圓不逾望) 일중위지경(日中爲之傾)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독야사시청(獨也四時靑). 잣나무. 둥근 달은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해는 금방 기울어도, 뜰 앞에 선 잣나무는 사시사철 홀로 푸르다. 도력 높은 서산대사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 시다. 분노해야 하지만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자존감이 필요한 시기에 여전히 유효한 오백년 전의 목소리다.

봄바람이 분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민망하도록 새벽 공기가 차지만 바람이 부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순 가까운 철부지가 소리 지르며 박수를 칠만큼 봄은 다가왔지만 땅을 일구고 씨앗을 넣어 가꿀 일이 걱정스럽다. 봄바람은 숙제를 남겼다. 봄바람을 그저 누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리 기뻐할 만한 일도 아니다. 봄바람은 숙제다. 밭에 거름을 펴고 씨감자를 나눠 잿밥에 버무려야 하지감자를 먹을 수 있겠다. 그동안의 숙취와 두통을 털어버리고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시절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하지감자는 물 건너간다.

모처럼 아내와 함께 읍내에 나가 잔치국수를 먹었다. 국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봄바람이 불어오니 갑자기 잔치국수가 먹고 싶어져서다. 맛있는 국수를 곱빼기로 먹고 나니 씨감자가 눈에 밟힌다. 봄바람은 숙제다.


▲서산대사의 시 독파릉엄(讀罷楞嚴)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