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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5-03 23:56:42

철조망에 묶인 세월

[홍순천의 ‘땅 다지기’(26)]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7-05-10 11:3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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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비가 오신다는 소식에 서둘러 고추모종을 심었다. 달달한 봄바람 대신 황사가 가득했지만 5월을 찾아 날아 온 산새들이 응원한다. 그늘이 짙어지는 숲은 새들을 끌어안았다. 잎을 털어낸 겨울 숲에서는 들리지 않던 온갖 새소리가 가득하다. 여름으로 들어선 오월, 숲에서는 연신 향기가 우러나온다.

모처럼의 휴가를 맞은 가족들과 함께 며칠 동안 여행을 떠났다. 대나무와 차밭이 늘어선 섬진강 가를 달리며 부드러운 강물의 속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다. 여름이 깊어져 가는 하동에는 매실이 벌써 대추만하다. 속 쓰린 지난겨울의 칼바람을 견디던 찻잎은 벌써 단정하게 머리를 깎고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몸단장이다. 몸단장 한번으로 평생을 흐트러지지 않는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세상은 늘 살피고 보듬는 노력을 먹고 유지된다. 정갈한 차밭은 이를 가꾸는 손길들의 오랜 보살핌 덕에 가지런하고 차분한 풍경이 되었다.

내친김에 목포로 갔다. 목포 북항에는 뭍에 거치된 '세월호’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난 3년간의 수장으로 몹시도 숨이 찼을 세월호는 만신창이였다. 멀리서 바라봐도 녹슬고 찌그러진 선체는 철저한 통제 속에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휴일에도 목포를 찾은 많은 사람들의 표정은 침통했다. 아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고요한 강물이 흐르듯 사람들의 발길은 세월호를 훑고 지나갔다. 미수습자 가족의 기다림에 위로를 건네는 것조차 사치스러워 아무 말도 못했다. 노란 리본 하나를 철조망에 걸고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는 철조망을 가득 채운 노란 리본 속에 또 갇혔다. 죄명도 모르는 수인(囚人)이 되어 군대에 갇혔던 세월이 떠올라 답답했다.

철조망에 세월이 갇혔어도 봄은 오고, 여름이 깊어졌다. 지난한 칼바람을 견뎌낸 촛불은 지난 세월의 적폐를 철조망에 가두고 새로운 지도자를 만들어냈다. 죽 쒀서 개 준 지난 시절의 민중혁명은 늘 아쉬운 대목이었다. 모처럼 숨통이 트이고 안도감이 생기는 결과를 이루었다. 5월 9일, 장미대선은 일말의 희망을 주었다. 기쁘고 들떠서 딸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셨다. 나라다운 나라가 되려면 아직도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만 이제 겨우 숨통을 틔운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2010년, 부패한 튀니지 경찰의 노점상 단속으로 생존권을 위협받은 26살 청년이 분신자살로 항의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튀니지 민중은 반(反)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벤 알리' 대통령은 총칼로 민중을 진압했지만 투쟁은 1년이 넘도록 전역으로 확대되고 거세졌다. 결국 군부가 중립을 선언하자 튀니지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24년간 계속된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이 사건을 재스민혁명(Jasmine Revolution)이라 불렀다. 재스민은 튀니지를 대표하는 꽃이다. 이 민주화 운동은 아랍 국가에 확대되어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까지 무너뜨렸다. 깨어난 시민의식이 만들어 낸 놀라운 변화다.

우리에게도 위대한 촛불혁명이 있다. 총칼에 맞선 재스민혁명보다 더 위대하고 평화적인 혁명이었다. 하지만 정권교체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재스민 혁명이 성공했지만 그들은 또다시 독재에 시달리고 있다. 희망에 들떠 방만해져서는 안 될 시점이다. 고삐를 더 틀어쥐고 마음을 다잡아야 희망을 완성할 수 있다. 세월은 아직도 철조망에 갇혀있다. 숨통을 틔웠다고 바로 회복이 되지는 않는다. 철망을 거두고 샅샅이 드러내 청소해야 천지에 진동하는 악취를 제거할 수 있다.

그래도 모처럼 후련한 날이다. 우리 모두의 승리다. 더욱 겸손해져야 할 성취다. 먼 훗날 오월의 어느 날 우리는 자랑스럽게 이겼노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여름이 깊어간다.


▲세월은 아직 철조망에 갇혀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