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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 유감

[홍순천의 ‘땅 다지기’(28)]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7-06-01 11: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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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낡았지만 편안한 의자처럼 익숙한 아침 안개가 가득하다. 모처럼 내린 단비에 찔레꽃 향기가 콧속으로 훅 파고드는 새벽에 모내기를 마친 농부들의 경운기 소리가 혼미한 머릿속을 두드린다. 벌써 유월, 시간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경쾌하게 흘러간다. 이모님의 부고를 받고 전주에 나가 낯익은 짠내가 풍기는 남부시장을 들렀다. 오래된 식당에는 콩나물 해장국이 끓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길가에 앉은 할머니들은 밭에서 기른 열무와 나물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익숙하지만 불편한 현실이다.

단오(端午)가 지났다. 몽룡과 춘향이가 향기 가득한 바람 속에 연애를 하던 좋은 시절에 생을 마감한 이모님은 찌그러진 역사를 반영하는 영정사진으로 맞이해 주셨다. 숱한 질곡을 몸으로 버텨내야만 했던 어머니 시대의 역사는 이제 숨결을 놓고 박제된 기념품으로 가슴에 묻혔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절이지만 장례식장에서 모처럼 만난 형제들은 오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며 쓴 소주잔에 코를 빠뜨리고 허망한 시간을 나누었다. 시절이 좋아 더 서글픈 이별이었다.

단오는 음력으로 5월 5일이다. 설날, 한식, 한가위와 함께 오랫동안 지켜오던 4대 명절이다. 음력으로 홀수가 겹치는 날은 좋은 날로 여겨 기념하던 어른들은 단오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수릿날'이라고도 불렀던 단오는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오는 날이기도 했다. 창포를 삶아 머리를 감고, 이맘때 뜯을 수 있는 수리취로 떡을 만들어 먹으며 이제 제몫을 하게 된 소의 코를 뚫어 코뚜레를 채우는 날이기도 했다. 동물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질 수도 있는 코뚜레는 사실 소와 인간을 연결하는 소통의 고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단오에는 담장 안에만 갇혔던 여인들이 나들이를 하며 바깥구경을 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험악한 통치가 외국여행을 금지하던 시절에 여권을 만드는 것은 애초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정부에서 하는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속을 수밖에 없었다. 무지한 백성으로 길들여 다스리기 쉽게 하자는 권력자들의 속셈이 고스란히 드러난 짓이었다. 요즘은 참 다행스럽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터널을 지나 햇살을 만난 듯하다. 아홉 개의 문을 지나야 만날 것 같던 세상이 코앞에 다가 선 느낌이다.

단옷날에는 '술의(戌衣)'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술의는 태양을 상징하는 신성한 옷이다. 여인들은 모시를 잇꽃(홍화)으로 물들여 홑치마를 만들어 입고 하늘의 뜻을 맞아들였다. 몽룡을 혼미하게 했던 춘향의 치마폭이 분홍색이었던 이유다. 오방색으로 국민을 혼미하게 했던 여인들의 작태와는 확연하게 다른 순수한 의식이다. 이지경이 되도록 반성하지 않는 뻔뻔한 모녀와 국방비를 쌈짓돈으로 여기는 군인들의 비열한 사기가 가차 없이 드러나는 시원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보수로 위장한 수구세력들은 자기 세계를 지키려는 음모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자신들이 정당하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가족들 사이의 분쟁이나 나라 살림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는 회한이 든다. 가슴을 풀어 헤치고 하늘의 뜻을 받아 들여야 하겠다. 소통이 없으면 결국 스스로 썩을 수밖에 없다. 사대강 사업이 여실히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모처럼 내린 단비에 갈증이 가신다.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작물이 말라 죽지는 않을 듯해서 마음이 놓인다. 쓸데없는 농담과, 지나친 관심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재미를 느끼니 아직 요순시대는 요원한 듯하다. 요임금의 아내가 손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니 게으르고 교만한 풍속이 사라져 세상이 평화로워졌다고 했다. 더워도 밭에 나가 풀을 뽑아야겠다. 정치에 무관하게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한다.

단오 무렵, 곡식과 과일은 몸을 키우고 숲은 짙어지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도 가을은 올지니 부지런히 손을 놀려 맞이해야겠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듣기 위해 북을 설치한 요임금의 소통이 절실한 단오 무렵이다.


▲복숭아는 발그레하게 물들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