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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장마

[홍순천의 ‘땅 다지기’(31)]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7-07-13 09: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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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열어둔 창틈으로 바람에 밀려들어온 빗방울이 후두둑 이마를 친다. 어둠을 틈타 찾아오는 연인처럼 요즘 장맛비는 밤에만 오신다. 홀로 잠든 밤,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치고 나선 마당엔 빗소리만 가득하다. 이럴 땐 스스로 끊기로 한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새벽 두시, 돌아서면 키를 키우는 잡초처럼 상념의 뿌리를 끊지 못하는 불면의 밤에는 아직도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운 유년기의 아이처럼 외롭다.

다섯 시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 더 남았다. 잠을 포기하고 책상에 앉았다. 잡초를 핑계로 밀쳐두었던 녹색평론 155호를 돋보기와 함께 집어 들었다. 변비처럼 막혀있던 일들이 함께 터져 나오듯 4대강 사업과 러시아 혁명이 다시 눈앞으로 지나간다. 무모한 아집으로 흉흉했던 시절을 온몸으로 치러낸 사람들에게야 요즘 겪는 일들이 눈물 나도록 감격스럽겠지만, 제 것만 지키려 했던 사람들에게는 치욕스럽고 불안한 시절이겠다.

올해 장마는 조금 늦게 오셨다. 먼지만 풀풀 날리는 땅을 바라보며 가슴 졸였던 유월을 지나, 칠월이 되어서야 메마른 농토를 적시기 시작했다. 요즘은 초가지붕에서 미꾸라지가 떨어지던 어린 시절의 지루한 장마와는 다르다. 인간의 뜨거운 욕망이 공기를 덥히고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물에 빠져죽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우리나라의 장마 행태는 변절했다. 시간도 규칙도 지키지 않는 야비한 선수처럼 반칙을 일삼는 장마는 우리나라를 아열대로 바꿔 가는듯하다. 바나나가 열리니 더 이상 파파야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겠다.

장마는 동부아시아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아열대 공기인 태평양 북쪽의 습한 기단과 극지방에서 내려온 찬 공기층이 만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동부아시아 크기의 한대전선이우리나라에 장맛비를 뿌렸다. 구름이 많고 눅눅한 장마철에는 오히려 봄 가뭄이 그리워진다. 집안에 널어 둔 눅눅한 빨래와 곰팡이가 지겨워질 무렵이면 보송보송하게 맑은 날이 기다려진다. 변변한 옷가지 없이 미끄러워 자꾸 벗겨지는 고무신으로 여름을 나던 어린 시절에도, 물방울이 돌돌 구르는 토란잎을 끊어 머리에 이고 황톳물 그득하게 흐르던 신작로를 걷다보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말씀이 실감났다.

100년 전의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변화였다. '닥터 지바고'와 '오마 샤리프(Omar Sharif)'의 콧수염으로 기억되는 러시아 혁명은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은 실패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던 무모한 자본주의의 집착이 전체를 읽지 못한 탓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촛불의 바다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장맛비를 손바닥으로 가리듯 촛불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폄훼하는 사람들 사이의 농간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장맛비는 충분히 눈물을 흘린 뒤에나 물러날 것이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은 농사를 시작하며 나라의 틀을 세웠다. 동물을 사냥하고 자연이 주는 열매를 거둬 생활하던 방식이 크게 달라진 시절이다. 생활이 바뀌자 자연스레 하늘의 표정은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재산을 모으고 여성의 순결을 강요하는 남성 중심의 세상이 되자 세상은 거칠게 요동쳤다. 그 습관은 학교급식을 책임지는 조리사 아주머니들에게 막말을 던지는 '여성 국회의원'의 언행에서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누천년 쌓인 습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야 없지만 폭력의 역사를 이제 더 이상 용인하면 안 된다.

장맛비에 이마를 얻어맞고 잠 못 이루는 새벽에 생각이 너무 멀리까지 왔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와서, 날이 밝기 전에 떠나는 연인처럼 비가 잦아들었다. 새벽이 오기 전에 문을 열고 나가 연인을 보내는 마음으로 늦은 장마를 이마에 받는다. 윤 오월이 다 지나는 7월, 매미가 일어날 새벽에도 더위가 한창이다.


▲늦은장마를 맞으며 굵어가는 포도는 이제 곧 얼굴을 붉힐 태세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