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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제자리로 돌아가기

[홍순천의 ‘땅 다지기’(46)]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8-02-07 21: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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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형제들과 함께 제주도에 가자는 전화를 받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제주도는 늘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풍경이다. 그 풍광을 눈에 담고 싶다는 기대보다, 나이 많은 누이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어서 더 가슴 저린 제안이다. 혹독한 추위가 물러서지 않지만 설은 다가왔다. 하얗게 지붕을 덮은 서리, 잔뜩 웅크린 조팝나무는 아직 봄이 멀었다고 말하지만 가슴 속에는 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입춘이니 봄이 오려나? 기대 반, 우려 반. 강물처럼 인생은 흘러간다.

설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워도 볼 수 없는 부모님과 오래된 친구들이다. 삶의 물살에 흩어져 얼굴도 볼 수 없는 사람들. 빡빡한 현실에 분주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 속에 그들은 남아있다. 큰 맘 먹어도 서로 시간을 맞추기는 어렵다. 폭풍처럼 지나치는 세상에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부질없는 신기루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했다. 막히는 도로를 탓하지 않고 보따리 챙겨 고향으로 마음을 돌리는 절기다.

인공지능이 연결하는 세상에서는 굳이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잡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공간 안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며 만나고 헤어지지만 진득한 기쁨이 남지 않아 뒤끝이 허전하다. 빨리 많이 가질 수 있지만 허기는 여전하다. 풍요가 낳은 빈곤이다. 가상공간에서는 맛난 음식을 함께 나누고 떨리는 손길을 피부로 느낄 수 없어, 그 풍요는 편하지만 가슴이 헛헛하다.

허전한 뒤끝을 채우기 위해 때론 가상공간을 벗어나야 한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오투오(offline to online or online to offline)’는 현명한 선택이다. 빠르게 정보를 유통하는 가상공간과 현실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전략이다. 가상공간을 통해 현실의 요구를 빠르게 충족하는 문화는 이미 우리 속에 있다. 앞만 보고 가서 불안하지만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는 개체가 많은 인류는 나름 현명한 유기체다. 컴퓨터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유통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한 엘빈 토플러(E. Toffler)조차 예견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다. 빠른 세월의 균형을 잡으려 급하게 선회하는 전략은 생존을 위해 유전자에 각인한 인류의 본능이다.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려 집을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는 전략은 탁월하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고독은 열려있는 마음으로 준비한 사람을 피해간다. 조심스럽지만 공평한 몸부림이다.

멀리 살아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는 형제보다,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이웃이 더 소중하다. 이웃이 먼 사촌보다 좋다는 어른들의 말씀은 허투루 들을 얘기가 아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이 더 따스하다. 마음속에만 남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더 애달프다. 설이 다가와도 마음 돌릴 곳 없는 외로움이 산골만큼 깊다. 먼 길 마다 않고 돌아올 자식들을 위해 비질하고 사립문을 열어두는 마음이 이제야 가슴에 닿는다. 소통을 위한 도구는 차고 넘치지만 마음에 없으면 공염불이다. 돌이켜 생각나는 사람들이 그립다.

며칠 전,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빛을 잃는 개기월식이 있었다. 모처럼 일어난다는 현상을 보며 의도하지 않아도 내 존재가 때론 이웃을 가려 상처를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빛으로 상처 입은 블러드 문(blood moon)처럼 마음에 각인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마음으로만 되새기는 공염불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허탈하지만, 그리움 때문에 그나마 살만한 용기가 생긴다. 태양빛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달처럼, 곧 밝아질 세상을 기대하는 어설픈 욕망이 팍팍한 현실을 견디게 한다.

입춘이 지났어도 아침이면 서릿발 추위가 하얗다. 눈밭에서 먹이를 찾는 산새들 목소리가 높아진 마당에서 봄을 찾지만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산새들 노래가 빈 하늘을 울리고, 바람기 없는 마당에 쪼그려 앉은 해바라기가 어설프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연애편지처럼 따뜻한 햇살이 세상에, 가슴에 가득하길 빌며 봄을 기다린다.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설이다. 그리운 사람들이 눈앞에 삼삼하다.


▲눈이 내려도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릴 수 없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