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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먼지

[홍순천의 ‘땅 다지기’(49)]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8-03-07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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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온 밤을 지키는 달빛에 새벽잠을 설쳤다. 잠 못 이루는 새벽 마당에 코끝을 베는 추위는 없다.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봄 향기가 느껴진다. 온 나라에 가득한 음습하고 추악한 욕망이 '대나무 숲'에 토해낸 노래를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봄은 와르르 쏟아져 오고 있다. 밤을 밝히며 어둠을 몰아내는 달이 마당을 환하게 빛낸다. 등불은 어두울 때 켜야 제 역할을 한다. 때론, 권력을 양가죽처럼 뒤집어 쓴 사람들 앞에서 속절없이 나약해보이지만 등불의 심지를 돋우듯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달빛이 속삭이는 말이다.

춥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힘은 어디로부터 나올까? 이맘때의 '국민학교'는 새 학기를 맞이해 늘 분주했다. 먼지를 털어내고 유리창을 닦았다. 나무 바닥에 양초를 먹이며 걸레로 문지르던 고사리 손들은 겨울 내내 쌓인 추위를 녹이느라 난롯가로 모여들었다. 조개탄을 때는 난로에서는 연기가 폴폴 새어나와 수시로 창문을 열어야 했다. 그 야속한 창문가에 눈길을 확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창가에는 하얀 수반 위에 얹혀진 '조' 이삭이 있었다. 햇살 드는 창가에 자리 잡은 조 이삭은 농부의 손아귀를 벗어나 굶주린 겨울새들의 눈을 용케도 피했다. 날이 풀리자 조 이삭은 눈 녹은 물을 마시며 여리고 푸른 새싹을 틔워 올렸다. 길가를 지나던 선생님의 눈에 들어온 그 생명력은 교실로 옮겨졌다. 가난한 교실에서 꼬물꼬물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창가에 조 이삭을 올려둔 그이의 낭만이었다. 조 이삭은 그리 오래 창가에 머물지 않았지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충격처럼 가슴에 남았다. 먼지처럼 쌓인 보잘 것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도 때론 힘이 된다.

창은 안에서 열어야 한다. 본래 밖에서는 열 수 없게 만든다. 자기 스스로 문을 열고 허물을 털어내야 한다. 허물을 가릴수록 의혹이 커지고 창을 열라는 압박도 거세진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열리지 않는 것이 봉창이다. 고집스럽게 자기 세상만을 주장하는 사람을 봉창이라 부른다. 봉창은 두드려야 제 맛이다. 솔직하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도 찜찜한 상처는 남는다. 거짓말로 가리고 포장하는 파렴치한 권력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 있다. '양심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베개'다. 잠 못 이루는 밤은 스스로 벗어나야한다. 그래도 용서할까 말까다. 연일 드러나는 치부에 분통이 터진다. 개구리도 놀라 뛰쳐나올 판이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겨우내 씻지 못해 갈라진 손등에 돼지기름을 바르고 부럼을 깨물며 기지개를 켰다. 짚을 엮어 불을 붙이고 달님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기 위해 희고 얇은 종이를 불살라 공중으로 올리는 일을 소지(燒紙)라 한다. 굿판에서 무당은 악귀를 몰아내고 병을 고치기 위해 소지했다. 마음속의 때를 몰아내지 않으면 병이 치유되지 않는다. 겉만 닦는다고 몸이 건강해지지 않는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지 않으면 당연히 몸에 병이 든다. 달집태우기는 묵은 때처럼 쌓인 감정을 풀고 새로 시작하는 농사에 힘을 보태는 마을의 소지 행위다.

청년들이 모여 마을회관 마당에 달집을 만들었다. 솔가지를 모으고 대나무를 베어 달집을 만드는 동안 막걸리 사발을 돌리며 지난겨울 소식을 안주처럼 곁들였다. 왼쪽으로 꼬아 두른 새끼줄에 소원을 써서 매달았다. 마을의 화합을 위해 궁색한 주머니를 터는 노인들의 격려가 아직 차가운 바람을 녹인다. 창문을 열고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마음을 열어 묵은 감정을 털어내지 않으면 그나마 남은 정이 낱낱이 깨져 바람에 날아 가버린다. 어설픈 솜씨로 사물을 두드리며 상쇠 뒤를 따라 마당을 돌면 놀이꾼들의 입에 막걸리와 안주를 넣어주는 마을사람들의 손길이 정겹다.

제사상에 올린 지방(紙榜)을 소지하며 안녕과 재회를 소망하듯, 달집을 태우며 먼지를 털어내는 봄이다. 세상의 온갖 부정과 음흉한 욕망이 함께 타올라 연기처럼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엊그제 내린 봄비에 날이 제법 물러졌다. 벌써 3월이다. 어설프고 나약하지만, 숨이 다하는 날까지 세상을 향한 노래를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각오가 새삼스레 치민다.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부끄러운 3월이다.


▲달집태우기는 거대한 소지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