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LOGO
최종편집: 2024-05-03 23:56:42

봄 서리

[홍순천의 ‘땅 다지기’(52)]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8-04-18 19:08:39)

IMG
(그림=홍순천)

혹한 겨울을 지난 살구나무가 꽃을 피웠지만, 향을 내기도 전에 폭설 추위가 덮쳐 시들시들 안타까운 봄이다. 올해는 살구 맛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안타깝다. 며칠 뒤 늦둥이 꽃 몇 송이가 피었다. 수상한 날씨를 짐작한 듯 늦게 핀 꽃 몇 송이가 가지 끝에서 빛났다. 하지만 또 서리가 내렸다. 지붕 위 하얀 서리에 놀라 맨발로 나선 마당엔 각시붓꽃이 추위에 떨고, 살구나무에 핀 늦둥이 꽃도 노랗게 말라 납작 엎드렸다. 아직 봄이 아닌가? 수상해진 날씨를 신고할 곳이 없어 발걸음만 종종거린다.

답답한 속내를 하소연할 곳 없어 마른기침만 내뱉는 새벽, 맞은편 산은 안개로 몸을 가렸다. 아침 해가 따뜻하게 떠올라야 안개가 걷혀 산을 볼 수 있겠다. 세상을 민낯으로 만날 날이 있을까? 안개처럼 불투명한 세월을 걸어오며 만났던 세상은 늘 상처투성이로 신음하는 짐승이었다. 상처를 드러내는 순간 만나야 할 폭력이 두려운 세상은 늘 안개로 제 몸을 가렸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라서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 권력은 적당히 조미료를 치고 안개 같은 속임수로 진실을 가리고 포장해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이다.

4월 중순에도 산골엔 서리가 왔다. 차창이 얼고 새싹들은 끝이 노랗다. 기세 좋게 올라오던 눈개승마도 뜨거운 물에 데친 듯 주저앉았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할 수는 없지만 안락하고 풍족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이상기후를 부추겼다. 피해는 결국 인류가 받아야 할 부메랑이지만 이미 저질러진 관성을 주워 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적당히 살만큼 살아온 사람들이야 크게 손해 볼 일이 없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후손들에게는 참으로 팍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리 내린 4월엔 노자(老子)의 얘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최고의 미덕이라 했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처신이며, 다투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경지라는 말이다. 물은 때가 되면 앞을 가로막는 온갖 허위를 거침없이 부수기도 한다. 중구난방(衆口難防), 많은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는 얘기다. 국민의 말을 막아 진실을 왜곡하는 일은 흐르는 물을 막는 것보다 더 힘들다. 많은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그동안 입을 틀어막고 왜곡했던 참상이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당사자들은 끝까지 진실을 거부하고 자기방어에 골몰하지만 터무니없는 얘기다. 흐르는 물을 잠시 가둘 수 있지만 영원히 막을 수는 없다.

4월이 오면 따뜻한 햇살에 꽃 나들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채 피기도 전에 된서리를 맞아 뚝뚝 떨어진 젊은 영혼들을 생각하면 꽃은 오히려 서글프다. 자기방어를 할 틈도 없이 떨어진 꽃잎들은 4월을 더욱 슬프게 한다. 4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의혹은 아직도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꽃보다 진한 노란 물결은 그칠 줄 모르고 세상의 균형을 이루고자 흘러간다. 지난 세월 동안 막혔던 온갖 불통이 이참에 말끔히 씻겼으면 좋겠다.

서리 맞은 백합이 노랗게 말랐지만 봄 햇살에 다시 힘을 얻었다. 백합은 씩씩한 싹을 올리고 작약은 꽃망울을 안았다. 봄 서리를 맞아도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그들의 끈기에 감탄하는 4월이다. 감자를 심고 싹이 오르기를 기다리지만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땅속에서 하지를 준비하는 감자를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 구린 구석이 있어 싹을 감추는 것이 아니니 참고 기다려야겠다.

호미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오후 햇살이 제법 따갑다. 새벽 추위와 오후의 열기를 종잡을 수 없는 봄이지만, 시련이 클수록 열매가 달콤하다는 말을 믿고 견딘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 단단히 힘을 키워야 한다. 봄 서리는 시련을 가장한 훈련이다.


▲각시붓꽃은 봄 서리를 이겨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