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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5-03 23:56:42

낮잠에 빠져

[홍순천의 ‘땅 다지기’(54)]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8-05-16 17: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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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한낮엔 벌써 30도를 웃돌고 작약은 화들짝 꽃을 피웠다. 향기 없어도 고혹한 자태로 유혹하는 작약은 피기 무섭게 오월의 상흔처럼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어졌다. 제 발등을 덮은 화려한 꽃잎은 밤이면 반딧불이가 되어 날아다녔다. 성급한 애반딧불이는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어두운 밤의 틈바구니를 열었다 닫으며 짝을 부르고 있다. 요망한 날씨는 종잡을 수 없이 혼란스럽지만 예상한 일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요망한 날씨처럼 혁명과 쿠데타를 오가던 우리 근대사는 불행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의 임시방편 때우기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했다. 첫 단추를 잘 못 꿴 결과다. 변명은 더 큰 변명을 낳고 걷잡을 수 없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져 풀어낼 수 없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뒤얽혀 난감한 상황이다. 그런지도 모르고 철석같이 정부만 믿어온 사람들이 배신감에 피워 올린 촛불은 들불처럼 번져 답답한 어둠의 틈바구니를 애반딧불이처럼 열었다.

아무리 변명하려 해도 과거의 역사는 돌이킬 수 없다. 뱉어낸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주워 담을 수 없고 한 번 진 꽃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욕망을 좇아 함부로 내지른 말과 행동은 우주에 기록되어 남기 때문이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 하나가 어마어마한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당장은 중언부언하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지만 사악한 그 속내는 금방 탄로 나게 돼있다. 최근에 벌어지는 통쾌한 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흑인을 노예로 부리고 후진국을 지배해 착취한 야만스런 역사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총칼로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고, 그 자본은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고혈을 빨아 돈을 거머쥔 부정한 재벌들은 세상을 노예처럼 지배했다. 법과 언론을 거느린 자본의 무소불위 권력은 지금도 사람들을 개 취급하고 있다. 국가 권력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책 없이 당해도 끈질기게 진실을 밝혀낸 사람들은 자본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흐르는 물처럼 도도한 역사는 평화롭고 균등하게 존중받는 인권을 향하고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고한 목숨을 희생시키는 역사는 이제 끝나야 한다. 아직도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기도하며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수구세력들은 정신 차리고 그 미명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도연명(陶淵明)은 중국 문학사에 빛나는 위대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은둔자로, 전원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술의 성인(聖人)으로도 불리는 그는 곤륜산에 무릉도원을 그려놓고 나비가 되어 주유(周遊)했다. 혼란스러운 세상이 백성들을 빈곤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피한 도연명을 이기적이라 평하기도 하지만 그이의 낮 꿈이 부럽다. 꿈속에서라도 남북으로 연결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덜컹거리며 내달려 바이칼로, 유럽으로 거칠 것 없이 쏘다니는 상상을 할 수 있다면 가슴 벅찬 일이다. 현실이 미명인지, 미명이 현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오수(午睡)에 빠져 개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소망이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거칠고 하늘이 낮다. 군고구마를 좋아하는 아내는 장터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정성스레 심고 다독였다. 요망한 세월처럼 날씨가 궂지만 비는 반갑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바쁜 손이 한창인 요즘 하릴 없이 시간을 죽이는 신세가 따분하지만 우화를 준비하는 번데기처럼 기다릴 일이다. 우체통에 둥지를 튼 딱새부부는 이소(離騷)를 준비하는 어린새끼 다섯 마리를 먹이느라 분주하다. 알에서 깨어나 노란 주둥이를 연신 벌리는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 현관을 나설 때마다 방해할까 조심스러워 발소리를 낮추며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우체통에선 날마다 소설처럼 꿈이 자라고 있다.

나비가 되었던 낮잠에서 빠져나와 얼굴을 찬물로 씻는다. 서로 격려하며 농사에 힘쓰고 해 지면 돌아와 쉬는 도연명의 무릉도원이 눈앞에 삼삼하다. 다시 오수에 빠져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싶은 오월이다.


▲낮잠에 빠진 작약 꽃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