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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와 국어의 역사

[책소개] 국어사개설(이기문), 태학사, 1998


... 문수현 (2019-07-24 16:31:14)

영화 <나랏말싸미>가 개봉했다. 한글창제와 관련한 한 가지 설을 극화한 작품이다. 새삼 한글에 대한 관심이 커진 느낌이다. 때마침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하다.

어제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한담을 나누면서도 한글 얘기가 나왔다.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흥미 이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이 많다. 우리 고유문자인 한글의 유래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국어사개설>만한 책은 없지 싶어 소개한다.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

<국어사개설>(신정판)은 1998년 국어학자 이기문이 쓴 책이다(이기문은 역사학자 이기백의 동생이다). 1961년에 초판, 1972년에 개정판이 나왔었다. 제목 그대로 국어의 역사를 연구한 것인데, 많은 대학의 국어국문학과 학부에서 교재로 쓰고 있다. 그만큼 체계적인 정리가 되어있고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은 책이다. 또한 초학자(初學者)를 위해 쓴 책인 만큼 아주 어렵지도 않다.

주요 내용은 국어의 계통과 형성과정, 문자체계,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국어 등이다. 이 가운데 한글 곧 훈민정음은 ‘문자체계’를 다루는 장에서 볼 수 있다. 저자는 이곳에서 훈민정음 창제의 의의를 이렇게 적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어의 완전한 문자화(文字化)라는 오랜 민족적 소망을 달성한 것이었다. 이 소망이 한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음소적 문자체계(音素的 文字體系)로 실현된 것은 하나의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입으로 말하는 국어를 그대로 만족스럽게 적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68쪽)

그러면서, 하나의 문자체계로서의 훈민정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독창성과 과학성이라고 강조한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자국어를 문자화하려는 소망은 이미 존재하는 문자체계를 채택하여 다소 손질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고대에 있어서의 한자에 의한 국어 표기법의 발달도 이러한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오늘날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들은 그들의 기원에 거슬러 올라가 보면 크게 몇 계통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그 어느 계통에도 속하지 않는 독창적인 것이다. 세종은 당시 알려져 있은 여러 문자를 참고했을 것임에 틀림없으나, 독창적인 제자 원리를 생각해 냈던 것이다. …훈민정음 체계에 있어서는 각문자와 그것이 표시하는 음소 사이에 직접적이고도 체계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어떤 문자도 이와 같은 과학적 원리로 만들어진 일은 없었던 것이다.”(69쪽)

하지만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불구하고 이미 굳어진 한문의 지위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훈민정음은 창제 당초부터 언문(諺文), 곧 ‘속된 말’이라 해서 얕잡아 불렸다.

“그러나 언문이 진작부터 궁중 나인들 사이에 사용되었고 차츰 사대부 계층의 부녀자들 사이에 보급되었음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그리고, 느리기는 했으나, 평민들 사이에도 점차 뿌리를 박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자가 온 국민의 문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와서의 일이다. 이 때에 國文(뒤에는 한글)이란 이름이 일반화되었고 言文一致의 이상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71쪽)

漢子는 우리 조상들이 접한 최초의 문자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고유한 고대 문자가 있었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학자들은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자는 본래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특이한 문자이지만, 일찍부터(이미 고대 삼국부터) 한문이 정착되기 시작해 19세기 말까지 계속됐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입으로 말하는 언어(口語)와 글을 쓰는 언어(文語)의 불일치를 오랫동안 가지게 되었다(이런 기형적인 상태를 20세기 초엽의 학자들은 ‘言文一致’라는 말로 불렀다.) …우리 나라 문인들은 입으로는 국어를 말하고 글로는 한문을 썼다는 매우 특수한 의미에서 二言語 사용자였던 것이다.”(57쪽)

그런데 이 같은 두 가지 언어의 사용은 국어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을 일으켰다. 즉 그 문어와 구어 사이에 간섭(干涉) 현상이 나타나(특히 문어(한문)의 구어(국어)에 대한 엄청난 간섭이 일어났다.) 한문 요소가 대량으로 국어에 침투한 것이다. 오늘날 국어 어휘 속의 방대한 한자어는 이 간섭의 결과다.(57쪽)

국어의 역사에서 분기점이 되는 사건 중 다른 하나도 漢子와 관련된다. 그 중 하나가 통일신라 때 일어났다. 이기문 교수는 이렇게 간명하게 설명한다.

“옛날 삼국의 지명은 서로 사뭇 달랐으므로 신라는 통일을 이룬 뒤에 나라 안의 모든 지명을 같은 방식으로 통일할 필요를 느껴 경덕왕 16년(757)에 漢字 2字로 고치게 되었다.(이로써 우리 나라에 漢子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국어사개설>(이기문) 본문

올해 초 최초의 한국어사전인 ‘말모이’, 그리고 주시경 선생의 영향으로 결성돼 활동한 ‘조선어학회’를 다룬 영화인 <말모이>가 개봉했었다. 여섯 달 만에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일설을 다룬 <나랏말싸미>가 개봉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때마침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3·1운동이 국어의 역사에서 갖는 의의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3·1운동 실패는 곧 민족주의의 실패요 실력양성론의 실패였다. 따라서 대중운동을 부르짖는 사회주의가 3·1운동 이후 한국의 일대 유행적 사조가 된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역사학자 임경석 교수는 3·1운동은 ‘한국 사회주의의 어머니’였다고까지 말했다(<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이런 점에서, 지식인으로서 문인들이 자기 작품에 한글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한글이 일반화하기 시작한 것도 3·1운동과 관련이 적잖은 셈이다.

<국어사개설>에서 이기문 교수도 3·1운동을 언급한다. 국문과 국한문의 대결에서 한자가 점차 한자어 표기에 국한되어 가는데, 그러한 경향이 일반화된 것은 3·1운동 이후의 일이었다는 것이다.(235쪽)

참고로, 한글의 대중화를 개척한 국어학자 주시경은 학자이자 실천가였다. 주시경은 1911년에 비밀결사인 ‘배달모음’ 결성을 주도하는데, 배달모음은 ‘정치혁명(한국독립)’과 ‘문명사업’을 교의로 하는 혁명적 민족주의단체였다. 이 배달모음 구성원 가운데 일본에 유학중인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1915년 도쿄에서 신아동맹단이라는 (사회주의적) 비밀결사체를 결성했다. 그 기치는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평등’이었다. 그런데 이 신아동맹단의 한국지부로 간주된 것이 바로 ‘배달모음’이었다. 그리고 신아동맹단 한국지부는 1920년 6월에 사회혁명당으로 계승됐다(임경석, 2003).

학문이 빈 자리에 미신이 찬다. 한글의 역사, 국어의 역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영화에서 얻은 흥미를 학문의 영역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국어사개설>의 필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