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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직접민주주의론에 비판적인가’

계간 『역사와 현실』...박상훈 시론 통해 인민주의 정치의 위험 경고


... 문수현 (2020-04-13 18: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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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의 대표 저널인 계간 『역사와 현실』이 최신호(제115호, 2020.3)의 권두에 「나는 왜 직접 민주주의론에 비판적인가」라는 제목의 시론을 게재해 인민주의 정치의 해악과 위험을 경고했다. 인민주의에 압도돼 있는 한국정치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돼 요약한다.

이 시론에서 필자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지금의 한국정치는 길을 잃었다. 다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의사 결정 체계는 무례한 소수에 의해 파괴된다. 그들은 동료 시민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지배하고 사유화하려 한다”고 말문을 뗐다.

그러면서, 시민이 직접 정치를 주도하고 정치는 시민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해야 한다는 직접 민주주의적 관점은 다음 네 가지 이유로 잘못됐다고 강조한다.

첫째, 민주주의는 이념이나 태도가 아니라 정체[정치체제]의 한 유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군주정, 귀족정, 공화정이라고 하듯이 민주정이라고 표현해야 더 좋을 때가 많은 용어다.

만약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정이나 민주정치라는 용어로 논의되었더라면 즉, 민주정이란 무엇이고, 군주정이나 귀족정과는 어떻게 다르며,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적용하는 공적 기능은 어떤 원리로 이루어져야 하며, 평등한 참여와 다원적 대표의 기초 위에서 책임 정치가 작동하는 구조와 체계는 어떻게 제도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논의되었더라면,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검찰청 앞 진보파’와 ‘광화문 보수파’ 사이의) 내용없이 격렬하기만 한 논란이 조금은 절제되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둘째,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실천되었던 직접 민주주의와는 다른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고, 고대 민주주의와는 매우 다른 원리와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그 다른 기원이란 지역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이 된 서유럽이며, 정치 공동체의 규모도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것이 소규모 도시국가에서 발원한 민주주의라면, 후자는 대규모 국민국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필자는 근대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좌파 대중정당의 결합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셋째, 흔히 대의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현대 민주주의는 참여의 범위는 물론 대표의 다원성 등 여러 측면에서 고대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발전된 모델이다.

예를 들어, 현대 민주주의는 - 시민이 번갈아 통치의 역할을 맡는 고대 직접 민주주의와 달리 - ‘시민의 동의에 의한 대표의 체제’ 혹은 ‘시민과 대표 사이의 협력 체제’를 특징으로 작동한다. 정치 엘리트나 직업적 정치 집단의 역할을 부정했던 고대 민주주의와는 이 점에서 크게 다르다.

넷째,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를 그 가치에 가깝게 실천하고자 한다면 현대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에 맞게 해야 한다.

20세기 전반기, 그러니까 1-2차 세계대전 사이까지만 해도 민주주의가 아닌 방법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았던 적이 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대표적이다. ‘인민’과 ‘민족’의 의지를 앞세웠던 이들 좌-우 전체주의가 득세할 동안, 당시 10여개에 불과했던 민주주의 국가들은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대세인 듯 보이는 최근에 와서 민주주의의 종말을 걱정하는 주장이 서구 지성계를 때렸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데이비드 런시먼 교수가 쓴 책 『How Democracy Ends』와 미국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함께 쓴 책 『How Democracies Die』가 대표적이라고 필자는 소개한다.

두 책 모두 2018년에 영어로 출간되었는데, 선발 민주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영국과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붕괴를 우려하는 책이 나온 것이다. 이 시기 영국과 미국에서는 의회나 정당 대신 국민이 직접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한쪽에서는 EU 탈퇴[브렉시트] 국민 투표를 했다. 다른 쪽에서는 위기에 처한 백인 민족(white nation)의 의지를 다시 세우겠다는 도널드 트럼프가 SNS의 위력으로 지지자를 직접 동원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체제 전반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의회와 정당은 기능 마비 상태가 되고 공동체는 분열되었으며 견해를 달리하는 시 민 집단들 사이의 적대와 증오는 커졌다. 이 두 나라만큼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FN: 국민전선]와 덴마크[DPP: 인민당], 독일[AfD: 독일사회를위한대안] 등에서도 유사한 도전이 있었다. 이들 극우에 가까운 정치세력 역시 대의 민주주의를 공격하며 직접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앞세웠다.

그런데 직접 민주주의가 우파의 전유물인 것은 또한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직접 민주주의가 보수보다 진보 쪽에서 더 많이 공명된다. 직접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말하는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정치인이나 정당, 의회가 민주주의를 독점하는 것에 반대하는 ‘혁신적 민주주의자’, 혹은 정치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출해 와서 시민과 사회에 가져다주는 ‘민주주의의 구원자’인 듯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다. 민주주의자가 그런 자만에 빠지지 않아야 민주주의는 지켜질 수 있고 또 발전할 수 있다. 시민 스스로 모든 것을 직접 할 수 있다는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민주주의의 파괴자가 되기 쉽다.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적 근간이란 무엇인가. 다시 요약하면 이렇다: 선출직 공직자를 선발해 공적 결정을 이끌게 하는 것이 시민의 자유를 확대하는 길이라 믿은 것. 정치 엘리트를 통해 정부를 운영하게 했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엘리트 집단이 그 과업을 맡을 자격이 있는지를 시민이 결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시민에게 책임지는 정치의 원리를 확립한 것. 법을 만들고[입법] 집행하고[행정] 적용하는[사법] 기능을 균형 있게 나눠 맡게 했고, 정견을 달리하는 시민들이 정당을 만들어 다원적으로 경쟁하게 하는 것을 통해 전체주의의 유혹을 차단한 것.

직접 민주주의론은 현대 민주주의의 이 모든 제도적 근간을 공격한다.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는 물론 노조와 직능집단 등 자율적 결사체들에 의한 이익 조정의 기능보다는 대중 집회와 국민청원 같은 무정형적 국민운동을 좋아한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즉각 해결하라는 정치적 조급증을 자극하며, 편견과 증오, 적대를 통해 압력을 행사하는 데 익숙하다. 불완전함에 대한 존중과 다름과 차이에 대한 지혜로운 관용 등 현대 다원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 이들에게는 깨어있지 못한 시민의 비겁함으로 치부될 뿐이다.

결국 필자는 직접 민주주의론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일이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잘하는 것이 수백, 수천 배 더 민주적이라고 강조한다.

한편 『역사와 현실』 제115호는 특집으로 <‘현대’의 탄생>과 <한국사 속의 당대사(當代史) 인식> 두 가지 주제 아래 6편의 논문을 수록했다.

<‘현대’의 탄생>에서는 ‘다이쇼 일본과 ‘현대’의 가능성(한정선), ‘현대사의 기점으로서의 러시아 혁명’(노경덕), ‘정치적 근대로서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윤용선)을, <한국사 속의 당대사(當代史) 인식>에서는 ‘13~14세기 고려 지식인의 시대 인식과 정체성’(김윤정), ‘조선후기 김경서 현창의 추이와 당대사적 의미’(장정수), ‘대한제국기 지식인의 국경 문제 제기와 영토 인식-장지연의 대한강역고를 중심으로’(채관식)를 각각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