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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반보기’

[홍순천의 ‘땅 다지기’④]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09-08 09: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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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잠자리 날개에 부딪힌 가을볕이 잘게 부서진다. 화살촉처럼 따가운 햇살은 저녁 무렵이면 어둑한 산 그림자 밑에서 서늘하게 식어간다. 갑자기 찾아온 가을은 풀잎 끝 이슬방울에 맺혀 아침 한때를 지내다 간다.

풀잎 끝의 이슬을 차며 새벽 논길을 걷는 재미는, 발끝을 적시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이맘때에만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더위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짧은 소매를 부끄럽게 한다. 백로(白露)에는 농작물에 흰 이슬이 맺힌다. 가을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시절이다. 맑은 날을 틈타 고추는 더욱 붉어지고 적당한 기온에 곡식과 과일은 단맛을 더해 간다. 백로에 비가 오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에 단물이 빠진다고 했다. 비가 오면 농사를 망치는 시점이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 쬐는 하루 땡볕에 쌀 12만 섬이 증산된다고 한다. 여름 장마에 자라지 못한 벼는 늦더위에 알이 충실해지고 과일은 단맛을 더한다. 늦여름의 땡볕을 감수하지 않으면 한가위 맛있는 밥상 위에서 햅쌀과 햇과일을 만날 수 없다. 유난히 빨리 찾아오는 올 한가위에는 중환자실에 누워계시는 어머니와 밥상을 마주하지는 못하겠다. 어머니와 마주 앉은 밥상은 이제 끝이다. 천상천하 고아가 될 것 같은 가을이다. 지난 여름, 가뭄에 속이 탔지만 이젠 맑은 날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늦반디가 듬성듬성한 이맘때, 밤하늘이 순간적으로 번쩍일 때가 더러 있다. 벼이삭이 패고 익는데 필요한 일조량이 낮의 것만으로는 부족해 밤에도 빛을 보탠다고 생각한 옛 농부들의 소박한 소망이다. 이 섬광이 잦을수록 풍년이 든다고 했다. 가을볕은 일 년 농사의 풍흉을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다. 어두운 세상, 밤하늘에 짧은 섬광이라도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한가위에는 대가 없이 베푸는 자연의 넉넉함이 가득하다. 5월 농부, 8월 신선, 넉넉한 품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시절이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바라보는 한가위 달은 절로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농사일에 바빴던 일가친척이 만나 음식을 나누며 하루를 즐긴다. 요즘이야 그럴 일이 없지만, 그리운 친정엘 갈 수 없는 시집간 딸과 어머니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회포를 풀고 즐기는 것을 중로상봉(中路相逢), 혹은 ‘반보기’라고 했다. ‘근친길이 으뜸이고 화전길이 버금이다’는 속담이 있다. 추석 즈음에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 동안 친정나들이를 하는 것은 여성들에게는 일 년 내내 기다리던 큰 기쁨이며 희망이었다. 한가위에는 몇 천 만 명이 고향을 찾아 나선다. 한가위만큼은 넉넉하고 여유로운 고향에서 보내고 싶은 이유다. 나랏님마저도 백성을 버리고 부모와 고향이 사라진 요즈음에는 비행기 타고 외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모태로 돌아가고 싶은 갈증 때문이다. 도시는 거대한 아기다. 땅으로부터 연결된 탯줄이 없으면 홀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베풀고 희생하며 모든 것을 내주던 부모처럼, 고향은 아직 마음속에 남아있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은 이제 거대한 양로원이다. 부모들이 죽고 나면 거대한 몸을 가진 아기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만으로도 막막하다.

산그늘이 점점 길어진다. 북쪽으로 갔던 태양이 이제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 철새처럼 남쪽으로 가고 있다. 단풍 들어 떨어진 낙엽을 스산한 바람이 몰고 다닐 시간이 멀지 않았다. 넉넉한 달빛처럼 한가위의 ‘반보기’가 서로를 살리는 나눔이 되기를 소망한다. 씨줄과 날줄을 섞지 않으면 그물을 만들 수 없다. 한쪽만 바라보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없다. 그 결과는 공멸이다. 어리석은 치우침이 넉넉하게 나뉘는 한가위이기를 기대한다. 다정한 사람과 어깨를 기대고 온밤을 지켜내는 한가위 달빛을 맞이한다면 더욱 좋겠다. 품을 열고, 사는 얘기 나누는 온기가 세상에 가득하기를 달님에게 빈다.


▲가을 하늘, 구름도 마주보고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 [편집자] [홍순천의 ‘땅 다지기’]는 격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