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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걸린 생선 가시 같은 부끄러움을 위하여

문병현(전주중앙여고 교사)


... 편집부 (2017-06-08 10: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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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문병현)

부끄러워도 써야 한다

우리가 윤동주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로 인해 송몽규도 강처중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윤동주보다 먼저 문학에 발을 들여놨고, 윤동주보다 더 실천적으로 일제에 맞섰다. 윤동주에겐 암흑 같던 시대를 밝혀주는 등불 같은 인물이다. 송몽규와 함께 윤동주는 시대의 억압과 공포에 맞서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강처중은 어떤가? 윤동주와 연희전문에서 만나서 윤동주와 교류하며 윤동주를 잘 보존했다가 세상에 내어놓았다. 정병욱이 윤동주의 필사본 시집을 보존한 것과 함께 강처중이 윤동주가 남긴 책들이며 윤동주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관해서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넘겨주고 본인이 나서서 신문에 윤동주를 소개하고 윤동주의 시집을 발간했다. 그 뒤 그는 해방 국면에서 좌우익 대립의 물결에 휩쓸려 그 존재를 감추고 말았지만 윤동주를 기억하려고 하는 사람들 눈에는 영원히 사는 윤동주의 옆에 자리잡고 있는 그가 보인다.

윤동주는 ‘시인의 슬픈 천명’을 자각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며 비참에 빠지고 통곡하며 슬픔을 뼈에 새겨야겠지만 나아가서 참상은 마음에 새기고 세상에 새기고 역사에 새겨야 한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대한민국에 새길 수 있어서 참사의 교훈이 적폐청산의 에너지가 된 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글로 영상으로 목소리로 기록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물 속에서도 시력을 잃지 않을 만치의 ‘이성’과 ‘의지’가 있어야 기록에 나설 수 있다. 윤동주가 살아서 남긴 마지막 작품인 ‘쉽게 씌어진 시’에서는 ‘시인’을 ‘슬픈 천명’으로 인식했다. 직접 나아가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괴로움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윤동주가 살기 어려운 인생 속에서 그 인생에 대해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자각하지만 그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은 지금처럼 공명을 이루지 못하고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마음을 기록하고 기록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갈고 닦으며 이상적인 나인 ‘최후의 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 이런 현실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마음을 시로 썼고 이 시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공명을 이루게 되어 윤동주는 지금의 윤동주가 된 것이다. 그 시대를 살면서 비명을 질렀을 수많은 사람들, 분노의 함성을 질렀을 수많은 사람들, 슬픔을 가슴으로 씹었을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윤동주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 마음을 담아 글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이건 ‘지성’이라면 기록에 나서야 한다. 기록에 게으른 삶을 살아온 게 부끄럽다.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부끄럽다

윤동주를 흔히 ‘부끄러움’의 시인이라고 한다. 송우혜도 윤동주의 ‘부끄러움’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데 그 ‘부끄러움’의 기원을 숭실중학교 입학 실패에서 찾고 있다. 윤동주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5년제 중학교인 숭실중학교에 편입하려 했다. 이때 편입시험에서 실패하여 용정의 은진중학교의 4학년을 마쳤지만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집안 어른들에게서 꾸중을 들었고 이로 인해 부끄러움을 특별하게 자각하게 되었다는 게 송우혜의 시각이다.

개인적인 실패와 이로 인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출발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개인사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동안 주목해온 것과는 다른 부끄러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윤동주의 ‘서시’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적인 실패와 그로 인한 부끄러움에 대한 공감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부끄러움’을 시로 잘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맹자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으로 사단((四端)을 말한다. 또한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말한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무측은지심 비인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無羞惡之心 非人也 (무수오지심 비인야)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辭讓之心 非人也 (무사양지심 비인야)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是非之心 非人也 (무시비지심 비인야)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惻隱之心 仁之端也 (측은지심 인지단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
羞惡之心 義之端也 (수오지심 의지단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辭讓之心 禮之端也 (사양지심 예지단야)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是非之心 智之端也 (시비지심 지지단야)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 『맹자』 공손추편(公孫丑篇)

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仰不傀於天 俯不怍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得天下英才 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 『맹자』 진심편(盡心篇)

이처럼 우리의 사고 저변에는 동양의 이상적 인간으로서 ‘군자’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런 이상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서시’가 특별하게 와닿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내놓은 윤동주 시인의 순수한 경지에 기가 눌리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어지는 공직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를 보면서 질문 받는 사람이 흠결 많은 사람인 것을 알고 놀라고 질문하는 국회의원이 질문할 자격이 없는데도 어디서 난 용기로 질문을 해대고 있는지 기가 막힌다. 저들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가지다가, 문득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살다보니 50년 가까이를 살아오게 되었는데 자랑스러운 순간보다는 씁쓸한 기억이 더 많은 볼품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 삶에 책임이 생긴 때가 대학교 때부터라고 생각하면 1980년대에 한없이 미안하다. 그때 더 치열하게 현장에서 싸우지 못하고 뒤에 서 있었던 것이 미안하다. 그때 가졌던 비겁함, 비굴함을 내면화하면서 여기에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탑재하고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나이를 먹어버렸다. 촛불집회에 나가고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활동을 해도, 여전히 목에 걸린 생선 가시마냥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가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인생에서 죽지 않을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진로를 두고 아버지와 갈등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과에 가라고 했으나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세상을 보는 눈을 더 맑고 또렷하게 하다 보니 그의 길이 결국 자기희생의 길이 되고 말았다. 만약에 그가 아버지의 권유대로 의과에 갔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운명에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감옥에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의 윤동주가 되지 못했고 무난한 생존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일반인의 삶이 아니다. 순수를 지향하며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스러운 삶이다. 유교에서 학문 수양의 목적을 ‘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왜 공부하는가에 대해 더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세상에 대해서 더 많이 가치 있게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는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윤동주는 이러한 삶을 지향했고 이런 삶의 길에서 기꺼이 자기희생의 길을 갔다. 생존 또한 가치 있는 삶일 수도 있지만 더 고양된 인간세상을 위해 자기희생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고귀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윤동주를 읽고 윤동주가 지향한 ‘삶의 길’을 내면화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지금 사는 우리 세상이 더 천국에 가까워지리라 생각한다. 윤동주를 믿고 다소 황당할 수도 있는 꿈을 꾸어본다.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하면 좋겠다. 욕심 사납게 저만 생각하며 살아간 인생에서는 절대 죽음이 자랑일 수 없다. 나를 뛰어넘어 더 큰 나를 추구하며,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웃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기꺼이 연대하며, 어둠에 갇혀 있는 마음들에 빛을 보여줄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기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결국 죽어서도 향기로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