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LOGO
최종편집: 2024-04-24 21:47:42

아직 추워

[홍순천의 ‘땅 다지기’(45)]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8-01-24 23:25:19)

IMG
(그림=홍순천)

멀리서 온 손님을 배웅하러 나간 마당을 점령한 찬바람이 코끝을 벤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겨울은 서릿발 가득한 마당에 시위하듯 버티고 있다. 오전 아홉시가 넘었지만 귓불을 떼어갈 듯한 추위가 세상을 장악했다.

겨울 추위야 당연하지만 옛날과는 사뭇 다르다. 사흘 추위 뒤에 문질러 널은 옷가지에 고드름이 달리기도 했지만 보송보송한 옷가지를 추스르는 나흘 동안 새물내 나는 정갈한 빨래를 개면서 나누던 정담은 이젠 동화가 되었다. 삼한사온(三寒四溫)은 옛말이다. 길어진 추위가 물러나면 미세먼지가 하늘을 덮어 바깥나들이를 두렵게 한다. 매 순간 코앞에 들이닥치던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위안해도 행복하지 않다. 날씨가 수상하다.

수상한 추위와 가혹한 더위는 체온이 오른 지구 때문이라고 한다. 온도가 올라 북극의 얼음이 녹고, 약해진 제트기류(Polar Jet Stream)가 냉기를 가두지 못하자 지구별 곳곳을 쏘다니는 극지방의 추위가 선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선물인지 재앙인지 모를 추위와 불볕더위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대로라면 빙하타고 내려온 '둘리'처럼 먼 훗날 박제된 인류의 표본이 박물관에 전시될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인류에게는 재앙이다.

재앙의 출발지는 당연히 욕심이다. 욕심이 권력을 쥐고 독점하면 중세처럼 암담하다. 권력은 항상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이 남용되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자유가 사라진다. 마녀사냥이라는 핑계로 공포를 조성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은 태양을 가리고, 결국 스스로를 붕괴시킨다는 기록은 생생한 현실이다. 지금이 혹시 중세는 아닐까? 자본과 권력이 손을 잡고 한 몸이 된 이 시대의 권력은 군주의 손에만 쥐어진 것이 아니다. 그에 편승한 인류 모두가 휘두르는 칼이 되었다. 한정된 상황에서 함께 생존하려면 절제와 양보가 필요하지만 절대 권력을 쥔 권력은 점점 더 큰 욕망을 키우고 있다. 중세보다 더 암담하다.

20여 년 간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을 집필한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의 기본 철학은 권력의 분산이다. 권력의 독점을 막아야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은 많이 다르다. 권력은 벼랑 끝에 다다를 때까지 자신의 힘을 남용한다. 코끝을 베는 추위가 닥쳐야 고개를 숙이는 양심이라도 감지덕지, 당당하고 오만한 권력은 세상을 끝까지 지배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공포를 조장하는 전제군주 시대와 달리 민주공화국은 불편하지만 검소한 권력과 평등을 요구한다. 엄격할 정도의 절제, 자기검열이 필요하다는 것이 몽테스키외의 일갈이다. 입맛이 쓰지만 외면할 수 없는 약이다.

스스로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 최근의 권력처럼, 통렬하게 반성하지 않는 인류에게 다가온 이상기후는 당연하고 당당한 회복의 몸부림이다.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를 무분별하게 사용한 결과로 지구 온도가 상승했다. 그 때문에 북극에 중심을 둔 고층 저기압이 약해지고 변형된 제트기류가 파급시킨 날씨변화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경고는 벌써 오래 전부터 들렸다. 조금 더 편하게, 더 좋은 것으로 오래 누리고 싶은 내 욕심이 주먹 쥐고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원자력과 석탄을 이용해서라도 안락한 생활을 더 오래, 더 많이 누리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지구촌 일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지만 인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욕망의 불꽃을 줄여야 할 때다.

햇살이 퍼져 안심하고 나간 마당엔 아직도 북극 기단이 맹렬하다. 손 끝 저리는 추위에 도망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창밖에는 얼어붙은 공기를 박차고 날아다니는 산새들이 분주하지만, 욕심 많고 나약한 이불 속에서는 어설픈 생각만 먼지처럼 바글바글 피어오른다. 추위가 물러가면 옷가지를 세탁해 마당에 널고 싶은데 아직은 추위가 너무 깊다.


▲햇살이 퍼져도 세상은 아직 춥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