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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톱만큼만

[홍순천의 ‘땅 다지기’(55)] 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8-05-31 19: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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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아침 이슬을 머금은 노랑어리연이 꽃대를 내밀었다. 새끼손톱만한 꽃봉오리에 햇살이 닿으면 화들짝 놀라 펼쳐지는 꽃잎은 아쉽게도 딱 하루만 세상을 누린다. 무당개구리 올챙이가 바글거리는 물속엔 듬성듬성 잎 새를 비집고 내일 피어날 꽃대가 올라와 마음을 달랜다. 겨울 얼음장 밑에서도 뿌리를 끌어안고 버틴 노랑어리연은 내일 피어날 꽃대를 올리며 부지런히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뿌리만 살아있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새들의 응원이 빛나는 아침, 발끝에 스며드는 이슬이 신선하다.

나이 들어서도 새끼손톱은 물려주신 부모님의 그것을 닮아있다. 유전자의 놀라운 기억력은 평생토록 몸에 각인되어 있다가 어느새 자식들에게 전해졌다. 좋은 것만 남겨주고 싶었던 당신들의 삶은 세월이 지나 손등에 주름이 자글자글 끓을수록 더 깊게 느껴진다. 망종(芒種)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손톱은 미처 자라지기 전에 닳아도, 손끝을 떠난 씨앗들은 부지런히 뿌리를 내려 꽃을 준비하고 있다. 새끼손톱만한 공간이 있어도 비집고 들어가 뿌리를 내리는 생명은 손에 뽑혀 던져지는 잡초로 치부되지만 끈질기게 살아 피워내는 그 꽃잎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촛불혁명 이후 처음으로 치루는 지방자치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방자치제도는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분산해 지역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각자의 특성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자는 취지가 근본이다. 중세 봉건사회의 영주가 절대 권력을 쥐고 지역주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락펴락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제도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기본 조건이다. 그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국민의 직접적인 참여로 권력을 분산시켜 독재를 막는 데 있다. 두 번째는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제일 중요한 현안으로 삼고 스스로 책임지는 행정을 도모하는 데 있다. 아울러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얻는 자기학습의 효과와 이로 인해 형성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은 중앙정국이 제아무리 혼탁하고 엉망진창이 되어도 지역을 든든히 지켜내는 원동력이 된다.

새끼손톱보다 적은 일부 권력자들이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고 팔아먹으며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지지고 볶던 사탕발림, 혹은 협박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다. 못된 근성을 훈장처럼 내세우며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새끼손톱만큼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그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석고대죄해도 용서를 받기는 이미 글렀다. 자기 씨만 키우겠다는 욕망으로 다른 사람들을 모두 짓밟은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이번만큼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을 눈 가리고 속삭이던 미명에서 벗어나 목소리를 제대로 내야 한다.

보릿고개를 지팡이 짚고 꼬부랑꼬부랑 넘어 가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조삼모사로 사기 치는 돈과 권력은 여전히 피둥피둥 건재하다. 그들에게도 양심이 있어서, 굶주리고 혹사당하는 사람들에게 손톱만한 애정이라도 있다면 이제 권력의 끈을 놓아야 한다. 손톱만한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더 이상 그들을 용납하고 기다릴만한 참을성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죽순을 키우느라 말라가는 대나무 숲을 바람이 건드리고 지나간다. 바람처럼 살리라 작심했다는 친구가 놀러왔다. 몇 해 전에 분양해갔던 노랑어리연이 드디어 올해 첫 꽃을 피웠다고.... 차가운 돌확에서 몇 해 겨울을 버텨도 손톱만한 삶의 의지 하나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꽃을 피워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그의 목소리에 흥분이 섞였다.

얼마 남지 않은 선거일을 앞두고 논밭을 휘젓고 다니는 목소리들이 소란스럽다.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새끼손톱만한 양심이 있다면 자식들의 미래에 힘을 보태야겠다.


▲새끼손톱만한 노랑어리연이 피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