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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氣致祥(화기치상)

[정은애의 ‘퀴어 이야기’(8)] 성소수자부모모임


... 편집부 (2019-01-19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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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은애)

기해년 새해가 밝았다.
십간 중 여섯 번째인 기(己)는 목화토금수 오행 중 토를 상징하고 토는 또한 황(黃)색을 뜻하기에 지지 중 돼지를 상징하는 해(亥)와 결부하여 황금돼지의 해라 일컫게 되었다.
황금돼지의 이미지만큼 많은 사람들이 올해는 어느 해보다 풍요와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듯하다.
좋은 일과 관련하여 새해 인사말로 널리 쓰이는 화기치상이라는 말이 있다.
“음과 양이 화합하여 상서로움을 이루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는 말이다.
정치권에서 여야가 치열하게 정쟁하다가도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때 화합하자는 명분으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또한 부부의 연을 맺고 결혼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덕담이다.
최근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후배가 결혼하는 경사가 있기에 그간 취미로 서예를 하며 눈여겨 본 좋은 글 중 화기치상을 집자하여 전각액자로 선물하였다.
허물없이 지내는 후배이기에 부족한 솜씨를 탓하지 아니하리라 어림하며 보냈는데 고맙게도 정성만으로 크게 기뻐하며 받아주었다.
그러면서 예상했던 질문을 하였다.
평소 트랜스젠더 아들과 함께 하는 선배의 모습을 자주 보아왔던 후배는 “그런데 음과 양의 화합은 평소 선배가 말하던 다양한 성소수자 정체성과는 안 맞는 것 아닌가”고 물어 왔다.
“음과 양이라는 것은 여자와 남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큰 것과 작은 것, 다수와 소수, 하늘과 땅, 강한 것과 약한 것 등 세상 만물의 다양성을 뜻하는 것이고
그러한 다양성에서 비롯된 조화로움을 인정할 때 상서롭고 길한 일이 생긴다는 뜻”이라는 걸 설명하자 비로소 의아해하던 표정이 풀어졌다.
여태까지 성별이분법에 근거한 많은 속담과 고사성어는 이제 새롭게 해석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내자식이....로 시작되는 말들은 성차별적인 발언이고
삼종지도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부장적 고사(枯死)된 성어이며
때리는 시어머니, 말리는 시누이... 이런 집이 있다면 당장 가정폭력으로 가중 처벌될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할 것이다.
선현의 말씀 중 귀담아 들을 것은 듣되 무조건 맹신하지 말고 생각해보고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019년인 요즘에 2000년전 성경에 쓰여진 “발굽이 갈라진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한다거나 혼방으로 직조된 옷은 입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철석같은 믿음으로 주장하여 주변 사람들을 기함하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후배의 결혼과 함께 자연스레 심각한 인구절벽 문제와 출산 등에 대한 의견들이 오고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꼭 출산만이 인구증가의 유일한 해법인가?
산술적으로 생각할 때 아이 한 명을 출산하여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가 될 때까지 최소 20년 이상이 걸리며 아직 경제활동이 가능한 장년층 인구들이 내년부터 연 88만명씩 은퇴 예정이라고 한다.
부부가 사랑하여 결혼하고 사랑의 결실이 아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제 출생률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 인구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출생률을 높이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대책이 강제적이거나 비혼인 사람과 비출산 커플을 비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인구감소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단기적인 지원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지난 정부에서 쏟아부은 93조 114억원(2013~2017년)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저 출생률을 기록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고 태어나서 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먼저 국가와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도 키우기 힘들거나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리는 사회라면 과연 그게 가능할 까.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 “아래에 있으면 짓눌리는 거고 위에 있으면 누리는 거다”처럼 남을 짓밟고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묵인하는 것일 때 대부분의 사람은 숨을 쉬기 힘들어진다.
위에 서서 누르는 극소수의 사람만 살기 좋은 세상일 때 어떻게 아프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나아가 살기 위해 아플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프기조차 못할 때 사람은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게 된다.
우리나라 10~30대 사망원인 중 1위, 40~50대 사망 원인 중 2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아이를 낳아 키워도 이렇게 인생의 한참 때에 생을 접는다면 출산 장려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통계에 따르면 최근 2017년 기준 자살자는 1만2463명이라고 한다.
하루에 40명이 넘는 숫자이며 OECD 국가 중 2위이다.
한동안 1위이다가 2위가 된 이유는 자살자가 줄어서가 아니고 2018년에 OECD에 새로 가입한 국가인 리투아니아가 우리나라보다 더 높아서라고 하니까 참으로 웃픈 이야기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자살과 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 복용률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라고 한다.
모든 병이 그렇듯이 우울증 역시 조기치료가 중요한데 병이 깊어진 뒤에야 병원에 가게 되니까 오래 입원해야 하고 정신과 진료와 입원 치료 등이 낙인이 되는 사회분위기에서 다시 병원방문과 약복용을 꺼리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얼마 전 본인의 환자에 의해 안타깝게 숨을 거둔 정신과 의사 임세원 교수 평생의 뜻인 “안전하고 편견없는 치료환경”이 부족한 것이다.
잘 살펴보면 인구 절벽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출생률 제고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지금 살아 숨 쉬는 서로의 안위를 살피며 돌보는 것이다.

성소수자라서, 남부러운 직장을 갖지 못해서, 언어와 피부색깔이 다르다 해서 사회의 낙오자로 간주되어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상식을 가진 다수의 사람이 품을 열어 그들의 존재 자체를 지지하고, 악의를 선의로 가장하여 공격하는 사람들을 제지할 필요가 있다.
소수자와 약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만 한다.
그들이 안심할 수 있을 만한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DNA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생명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믿을 것이다.
漢書(한서) 劉向傳(유향전)에 나오는 화기치상 뒤에는 長樂無極(장락무극)이 댓구로 이루어진다.
올해가 모든 사람에게 “음양이 화합하여 상서로움을 이루고, 즐거움이 끝이 없는 황금돼지해”가 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