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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 어머니

[홍순천의 ‘땅 다지기’⑤]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09-22 10: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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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추석의 노곤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태풍이 올라와 긴장되는 가을이다. 추분(秋分)이 다가오자, 겨울눈을 만드느라 속셈이 깊은 고향집 마당의 살구나무는 벌써 잎을 떨구고 있었다. 살구나무는 도드라진 겨울눈 속에 내년 봄에 내어줄 향기로운 열매를 품고 겨울 내내 추위를 견디겠다.
나락의 고개를 더욱 무겁게 하는 가을비가 밤과 낮의 균형을 이루는 추분 무렵을 적시는 새벽이다. 아직도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비틀대는 내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이다. 중도(中道)에 ‘반보기’로 가족을 만나는 한가위를 지나고 추분을 맞이했다. 더함도 덜함도, 치우침도 없는 추분의 중용은 덕(德)이다. 벼(禾)가 햇살(日) 아래 익어가며 향(香)을 내니 더없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발그레한 살구가 그리웠던 어머니는 마당가에 살구 씨를 묻고 다독이셨다. 시멘트 범벅인 벼랑 끝 한 뼘 땅에 용케도 뿌리를 내린 살구 씨는 홍수보다는 늘 가뭄이 두려웠다. 배배꼬인 잎이 안타까웠다.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공을 들이셨다. 병을 털고 나온 아이처럼 살구나무는 어느새 더 초롱초롱한 푸른빛이 짙어졌다.
타는 목마름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살구 씨는 어느새 손아귀에 가득 할 만큼 몸피를 불리고 의자 하나 가릴만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몸을 꼬며 비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살구나무 아래서 햇살을 피하다가 당알당알 나무에 붙은 진딧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꿈을 말리는 진딧물은 무엇일까? 쇠잔해지는 늙은 몸보다 더한 목마름이 무엇일까? 서로의 길을 방해하는 칡넝쿨과 등나무처럼 갈등이 깊어갈 무렵에 내린 봄비가 살구나무의 목숨을 지탱해 주었다. 우산을 들고 살구나무 아래에 섰다. 싱싱한 살구가 봄비를 맞이하며 반짝였다. 비 그치면 의자 두 개쯤은 가릴 그늘이 생기겠다는 기대감에 설렜다. 초록빛 양철대문 앞에 서성이던 사람의 숨결처럼 향기로운 바람이 기다려지는 봄이었다. 오래 전에 묻어두었던 살구 씨 속에 들어 있던 그늘은 불편한 다리를 끌던 어머니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훨훨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고 싶던 어머니의 꿈이었다.

열매를 많이 맺은 살구나무는 때론 가지가 부러져나가기도 했다. 제살 찢기는 줄도 모르고 살구를 키우던 나무는 아직도 고향집 마당을 지키고 있지만, 어머니는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 오르셨다. 구순의 세월, 마지막 송편을 드시지도 못하고 날아오를 만큼 짐이 무거웠을까? 아픈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울음을 참는 자식들의 상처를 쓰다듬듯, 살구나무 그늘은 여전하다.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오르신 어머니가 내년 여름에는 살구나무가 드리우는 그늘로 찾아오시겠다. 살구나무 밑에 놓인 먼지 쌓인 낡은 의자에서 어머니의 체온을 느낄 수는 없지만 겨울채비를 하는 살구나무가 손등에 낙엽 하나를 떨구었다.
잎을 떨구어 제 발등을 덮고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디는 나무들처럼 살아 내야 할 세상이 있어 오히려 아름답다고, 살구나무는 어머니 대신 내 손등을 다독였다.

남한산성 성곽 밑 아버지 무덤 옆에 화장한 어머니를 모셨다. 가을비 스며들어 잠자리가 축축할까 염려스럽지만, 가슴 속에 살구나무 하나 심고 돌아 왔다. 물봉선 수줍은 가을 길에 살구나무 그늘이 장하다. 나비처럼 날아오르신 어머니의 자유가 그리운 가을이다. 이젠 송편을 먹지 못하는 한가위만 남았다.


▲살구나무 밑의 빈 의자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 [편집자] [홍순천의 ‘땅 다지기’]는 격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