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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이 반갑지 않은 농부

[홍순천의 ‘땅 다지기’⑦]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10-19 20: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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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하룻밤 사이에 날씨가 수상해졌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려고 마당으로 나선 작은딸은 ‘추워, 추워’를 연발한다. 풀잎 끝에 이슬이 맺히고 차 유리창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주어야 아침 운행을 허락하는 가을이다. 마루 밑에서 혀를 날름거리던 유혈목이(꽃뱀)도 벌써 종적을 감추고, 아직 겨울준비를 마치지 못한 방아깨비가 비틀거린다.

10월 태풍에 밀려 순식간에 삶터를 잃은 남쪽 주민들처럼, 느닷없이 닥친 추위는 곤충들을 땅 속으로 숨어들게 한다. 곤충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풍조는 언제부터 생긴 버릇일까? 아마 기계문명이 사람들의 오만을 부추기기 시작한 무렵부터일 것이다. 팔다리에 근육이 붙기 시작한 아이가 어른들과 힘겨루기를 시도하는 것처럼, 동력을 이용해 어머니의 품인 지구를 쉽게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오만은 점점 치유될 수 없는 병처럼 깊어졌다. 자연과의 관계를 대결구도로만 상정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구의 상처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상처가 깊어지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공룡이나 아틀란티스처럼 지구상에서 인류가 종적을 감추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재해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한꺼번에 맞물려 삶의 근간을 온전하게 뒤집는다. 생활터전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질병과 원망이 사람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 상처를 치유하느라 정부나 행정, 민간조직이 대책을 내놓지만 해마다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산업사회 이후의 안락한 삶에 길들여져 그것을 침범하는 요인이 생기면 언제든지 전투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는 요즈음에도 순간의 비바람에 수많은 인명이 손상되고 재산을 잃어버린다. 미국도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재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자본과 결탁한 정부와 기업, 공직자들의 파렴치함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현재에도 빛나는 정신이다. 그 중 공직에서 물러날 때 새겨야 할 해관육조(解官六條)의 일부다. 旣沒而思(기몰이사) 廟以祠之(묘이사지) 遺愛(유애). 고을 수령이 이미 죽었지만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으로 보살핀 공이 죽은 후에도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정하게 긁어 들인 재물로 억지무덤을 만들면 반드시 동티나게 마련이다. 역으로 백성들이 고루 편안한 세상을 도모하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망하리라는 목민심서의 경고다.

들에는 고개를 숙인 벼로 넘쳐나고, 들깨와 고구마, 끝물 고추가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풍년이 들어 다행이기는 하지만 시골에는 일손이 없어 속이 탄다. 쓸모없는 부지깽이도 필요할 만큼 곡식 갈무리로 바쁜 시절이다. 하지만 농부들은 풍년이 들어도 즐겁지 않다. 수확을 해도 판로가 없고, 수입 농산물이 넘쳐나 헐값으로 처분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농산물을 돈으로, 안보를 돈으로만 보는 부정한 권력집단의 농간 때문이다. 선물시장을 통해 거대자본이 챙긴 이윤의 쭉정이만 들판에 가득하다. 농민들의 한숨이 허망한 이유다. 서리 내리기 전에 곡식을 챙겨야 하는 농부들의 가슴엔 가을바람이 먼저 불어온다.

상강(霜降)무렵엔 승냥이가 짐승을 잡아 챙기고 낙엽이 떨어져 벌레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땅으로 숨는다 했다. 그들처럼 밀린 가을일을 도모하는 내 손길보다 마음이 더 분주하다. 들깨를 베어 말리고 고구마를 캐서 갈무리해야 한다. 겨울 양식으로 맛있게 먹어 줄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윤 없는 농사를 마무리 하지만, 곡식 그득한 들판처럼 근심 그득한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백성들의 분노가 섞인 된서리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서리 내리는 시절의 분노를 알까? 농사도 짓지 않는 산골 촌놈의 가슴이 폭폭한 가을이다.


▲구절초는 여전히 씩씩하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 [편집자] [홍순천의 ‘땅 다지기’]는 격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