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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菊花), 드디어 피었다

[홍순천의 ‘땅 다지기’⑧]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11-03 07: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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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새벽하늘에 별이 초롱초롱하다. 남회귀선으로 여행을 떠난 태양은 아침잠이 많아졌다. 늦은 아침에야 얼굴을 내미는 태양은 동지에 이르기까지 게으름을 피우겠다. 오늘 아침, 올 들어 처음으로 서리가 내렸다. 산골의 이른 추위에 얼음도 얼었다. 진즉 김장 무를 뽑아놓았어야 했는데, 걱정이 앞선다. 날이 차도 마당가에는 국화가 씩씩하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입동(立冬)이 코앞인데, 두터운 외투를 준비하기도 전에 꽃을 피우는 국화는 을씨년스런 가을을 위로하는 따뜻한 등불이다.

국화는 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만든 꽃이라고 한다. 이번 생을 잘 마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가 편히 쉬라는 뜻으로 국화는 주로 조화(弔花)에 쓰인다. 국화의 탄생은 그리스 신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화에는 ‘타게스’가 등장한다. 타게스는 꽃을 정말 사랑한 남자였다. 그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만들고 싶었다. 타게스는 온갖 아름다운 꽃을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 향기로운 샘물을 붓고, 금반지를 녹여 색을 입혔지만 향은 고약하고 꽃잎은 바람에 날렸다. 주변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슬픔에 잠긴 타게스를 안타깝게 여긴 꽃의 여신 ‘플로라’가 그 꽃에 새 생명을 주었다. 그 꽃이 바로 국화라고 한다.

국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소선(李小仙)어머니다. 불꽃으로 타오른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당신은,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지켜내려는 이 땅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를 자처했다. 아들이 못다 한 일을 스스로 부여안고 평생 실천하며 사신 분이다. 이 땅의 모든 노동 가치를 말아먹으려는 사람들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학살된 아버지와, 정신대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을 맞이한 끈질긴 정신사가 그분의 평생을 관통했다. 장남 전태일의 유지를 버리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 ‘청계피복노조’다. 촛불 하나를 켜자 숨 쉴 공간이 생겼다. 촛불이 많아지자 어둠이 물러났다.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 국화처럼 터진 세상이 온통 난리다. 국화처럼 노란 촛불이 청계광장을 채우고, 고개 들기조차 부끄러운 현실을 지탄하는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국화 한송이를 피우기 위해 온 우주가 때를 기다린 것처럼, 일제히 피어오른 쌉쌀한 국화향기가 황량한 겨울 내내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생을 헌신한 이소선어머니처럼 잊혀 지지 않는 향기로 남았으면 좋겠다.

늦은 아침과 추위를 핑계로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켜켜이 쌓인 먼지가 진공청소기를 가득 채운다. 내친김에 지난겨울에 처박아 두었던 겨울 외투를 세탁기에 넣었다.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다.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는 말씀에 때늦은 부지런을 떠는 아침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제일 큰 죄라고 ‘노자’께서 도덕경을 통해 말씀하셨다. 지족상락(知足常樂), 만족할 줄 알면 인생이 즐겁다 하셨지만 산골 소인배는 아직 세상에 만족하지 못한다. 욕심을 버려야 할 사람들을 따로 있다고 소리치고 싶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는 어른들의 말씀처럼, 부조리하고 터무니없는 세상에 진공청소기를 들이대고 싶은 심정이다.

쌉싸름한 국화 향을 맞이하기 위해 마당가에서 무릎을 접었다. 쌀쌀한 바람이 어깨를 눌러도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온갖 번민과 분노가 국화 향기에 섞여 가슴을 찢는다. 담배를 피워 물고 바라본 앞산은 어느새 국화꽃 노란 색을 흉내 내고 있다. 촛불 하나가 틔운 숨통이 어둠을 물리치는 천지의 함성으로 커지기를,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소선어머니를 닮은 국화가 피었다. 봄이 오기까지, 겨울 내내 그 빛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촛불처럼 국화가 피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 [편집자] [홍순천의 ‘땅 다지기’]는 격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