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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인(天地人)-하늘 위의 하늘

[홍순천의 ‘땅 다지기’⑨]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11-08 1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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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새벽부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이맘때 내리는 비는 땅을 식히고 겨울 채비를 하는 온갖 생령들을 움츠리게 한다. 기나긴 겨울을 홀로 버티려 나무들은 잎을 떨궈 제 발등을 덮고 움츠리기 시작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스스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전자의 명령에 순응하는 그들의 겸손이 단풍으로 빛나는 시절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처럼 피었던 단풍이 땅으로 돌아가 새 생명을 준비하는 자기반성이 아름답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존재해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천지인’으로 정리한 옛 어른들의 생각은 어쩌면 지나친 인간 중심의 아집일 수도 있다. 벼가 익어 쌀을 내주고, 상수리나무가 도토리를 던져주니 쌉쌀한 묵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인류가 삶을 유지하는 것을 온전한 인간의 권리, 혹은 노력의 당연한 결과로 치부한다면 지나치다. 하늘은 열려 있어 모든 것을 나누고, 땅은 이를 받아 온갖 생령을 키워내 인간의 삶을 떠 받쳐주니, 근본 삼재(三才)가 조화롭게 세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자는 말씀에는 크게 공감한다. 그 어우러짐이 가능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소통이다. 삼재 중에 일방적인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일부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내세우는 자기 입장은 치가 떨릴 정도로 졸렬해서 분통이 터진다.

천(天)은 하늘·만물의 근본·조물주·진리·임금·아버지·지아비·남성이라 한다. 지(地)는 지구의 성격과 기능을, 인(人)은 만물의 성격과 기능을 의미한다. 하늘은 조화(調和)를 이루고, 땅은 교화(敎化), 인은 치화(治化)의 기능을 주관한다고 말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중성 11자는 천(ㆍ), 지(ㅡ), 인(ㅣ)의 삼재(三才)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군주와 남성 중심의 철학이긴 하지만 놀라운 지혜에 감탄하게 한다. 주역에서는 천도(天道)를 음양(陰陽), 지도(地道)를 강유(剛柔), 인도(人道)를 인의(仁義)라 말한다 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만물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질고 의로운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어른들 말씀 그른 것 하나도 없다더니, 요즘에야 실감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질지도, 의롭지도 않은 몇몇 사람들이 나라를 능멸해서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는 지경에 온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다. 물론 이는 몇몇 사람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는 그 백성들의 수준을 드러내는 지표일 뿐이라고 했다. 부조리함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비겁함을 드러내는 일이지만, 잠시 부글부글 끓다 마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평소에 준비하지 못하면 일이 터지고 나서 반드시 후회하게 될 일이 생긴다.

아침에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대선 전부터 국정을 농단하는 집단이 있었다는 보도를 보며 다시 한 번 경악했다. 박정희조차도 말로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했거늘... 그들이 평소부터 준비해 온 우주로의 망명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이참에 바로잡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미래는 오지 않을 듯하다. 스스로 미르(용)라 칭하고 우주의 기운을 모아 돈을 끌어 모은 집단을 뿌리째 뽑아 우주의 블랙홀로 던져버리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는 없다.

비 내린 뒤의 숲은 알록달록한 그림이 되었다. 설악산 단풍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따로 차비를 들여 단풍 구경을 가지 않아도 되니 그것도 산골에 사는 복이라 하겠다. 소년 시절, 주전자를 들고 물을 뜨러갔다가 계곡에 내려온 가을을 만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뒤로 사춘기를 톡톡히 치렀던 탓에 아직도 가을만 되면 가슴이 묵직해진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가슴에 남아 있는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비에 젖어 선명한 낙엽이 산자락을 덮었다. 연일 보도되는 광화문의 촛불을 떠올리게 하는 앞산 자락을 보며, 오늘도 또 살아 보겠다는 용기를 낸다.


▲가을산은 광화문의 촛불과 닮아간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