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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4 21:47:42

백 만 송이 장미, 촛불

[홍순천의 ‘땅 다지기’⑩]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11-14 21: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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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눈 내리는 겨울을 준비하는 바람이 소란스럽다. 낙엽이 쌓이는 마당을 바라보며 행낭(行囊)을 꾸렸다. 다이아몬드를 몰래 들여오던 전직 대통령의 행낭과는 비교되지 않는 초라한 가방이다. 여벌 옷 몇 가지와 양말, 칫솔을 챙기는 손이 분주한데 창밖에는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 더 소란스럽다. 지난밤의 숙취와 피로를 덕지덕지 안고 서울로 향했다. 달콤 쌉싸름한 커피 한잔이 그립지만 급한 마음에 포기하고 나서는 길을 소란스런 이웃집 개가 배웅했다.

‘백 만 송이 장미’는 비열하고 부도덕한 박정희의 놀이에 농락당한 가수 ‘심수봉’이 불러 우리에게 알려진 노래다. 러시아의 노래에 우리말로 가사를 붙인 이 노래는 라트비아의 노래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이 원곡인데, 강대국에 휘둘리는 나라의 운명을 암시한 것이라 한다. 마리냐는 라트비아 최고의 여신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신을 만나러 가는 행낭에, 전기가 끊기는 비상사태를 위해 준비해두었던 양초 한 상자를 챙겼다.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서울로 향하는 길 내내 낯선 풍경이 이어졌다. 버스들만 다니기로 약속된 길이 분주했다. 살면서 처음 만나는 일이다. 버스들이 줄 서서 고속도로를 점령하는 진풍경은 짜증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운 일이었다. 정체가 즐겁기는 처음이다.

공복을 무릅쓰고 도착한 탑골공원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삼일운동을 주도한 어른들의 자리에 아이들이 모였다. 부끄럽고 미안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고 지켜 서있는 중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시국선언문을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더 높아졌다. 종로를 점령한 농민들의 깃발이 지나가고, ‘세월호’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함성이 아이들을 격려하며 지나가는 종로는 낯설었다. 30년 전의 유월항쟁이 떠올랐다. 국민 대통합을 이뤄 낸 여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해가 지자 꽃이 피기 시작했다. 장미처럼 붉은 마음 대신 촛불이 켜졌다. 종로는 이미 만원 전철처럼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만나기로 약속한 지인들을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꽃송이가 은하처럼 흐르는 길을 따라 청와대 앞 도로에 멈췄다. 백 만 송이 꽃이 피었다. 청와대 가는 길을 막은 경찰이 ‘자제’를 요구했지만 꽃처럼 붉은 사람들의 마음은 막지 못했다. 모처럼 가슴 떨리게 소리쳤다. 목이 갈라지고 배가 고프지만 떠날 수 없었다. 소변을 볼 자리도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지만 백 만 송이 장미는 질서를 지켰다. 구급차에게 길을 내주는 와중에도 파도처럼 외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백 만 송이 장미는 한 몸인 것처럼 유연했다.

둘째 딸의 생일잔치를 포기하고 함께한 자리에 일을 마친 큰 딸이 합류했다. 딸들에게 자리를 맡기고 무릎 쑤시는 현장을 빠져나왔다. 축제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을 지나쳐 지인들을 만났다. 좁은 인사동 술집에 서식하는 바퀴벌레처럼 낄낄대는 사람들과 함께 찬바람 부는 종로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백 만 송이 장미가 환하게 피어올라 잠을 잘 수도, 쉴 수도 없었다. 차디 찬 바닥에 앉아 맞이한 새벽이, 부디 따뜻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까무러쳐 도착한 집에는 아침 햇살이 가득하다. 주섬주섬 챙겼던 짐을 풀었다. 주머니 안에서 빵 한 쪼가리가 나왔다. 오줌을 쌀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던 자리에서 지인이 내게 준 선물의 흔적이다. 마른 빵 한 조각처럼 초라하게 살아 온 세월이 문득 부끄럽다. 백 만 송이 장미가 남겨준 흔적을 치우고 까마득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내일은 더 밝은 해가 뜨려나? 아직은 터무니없는 꿈을 꾸면서 낮잠을 청하지만, 백 만 송이 장미의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시들지 않는 백 만 송이 장미를 머릿속에 그리며 행복한 피로가 몰려온다.


▲백 만 송이 장미는 마른 빵 한 조각으로 주머니에 남았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