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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새 앨바트로스(Albatross)

[홍순천의 ‘땅 다지기’⑮]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6-12-28 10: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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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겨울비가 오전부터 숲을 적신다. 산골마을 대동제를 알리는 이장님의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적막한 숲을 흔들었다. 찬비에 숨을 죽인 겨울나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마당을 찾아오던 산새들도 보이지 않는다. 무거워진 날개를 접고 새들은 어디선가 겨울을 견뎌내고 있겠다. 창밖을 바라보는 눈길도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대동제가 끝나고 육십을 바라보는 마을 청년들이 동네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뒤지기로 했다. 물고기 몇 마리라도 건져내 어죽을 끓이자는 생각이다. 농사를 마치고 한가한 겨울에 누리는 호사다. 여름과 달리 겨울 냇가는 견뎌야 할 것이 많다. 우선 운신이 자유롭지 않고, 추위가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여럿이 모이면 떠들썩한 기운이 겨울을 견디게 한다.

묵묵히 산골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은 바보새 앨바트로스를 닮았다. 일부러 바보새를 따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말마다 추위를 마다하지 않고 광화문으로 모여드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바보새는 날 수 있는 새들 중에 가장 몸집이 크다. 양 날개를 펴면 3~4m가 넘고 몸길이는 1m에 달하니 가히 하늘의 제왕이라 할만하다. 바보새는 하늘로 오르기가 어렵다. 거대한 몸집과 날개가 오히려 비행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땅에서 뒤뚱거리다가 먹잇감이 되기도 하고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려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기도 한다. 큰 몸집을 가진 숙명이다. 하지만 일단 하늘로 날아오르면 얘기는 달라진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위용으로 가장 높이, 멀리 날 수 있는 바보새는 가히 하늘의 왕자라 할만하다.

가슴이 답답해서 잠도 잘 오지 않고 식욕도 떨어지는 요즘에는 세상에 가득한 ‘바보새’들을 보는 재미로 산다. 주말마다 촛불을 켜는 국민들과 ‘세월호’의 불온한 징후를 일 년 넘게 찾아내 고한 사람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실력자들과 헛발질하는 의원님들의 뒤에서, 하늘 높이 날아올라 오랫동안 지켜보는 바보새들이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틘다. 희망을 잃지 않는 한 기회는 있다. 가짜 약을 먹어도 병을 치유하는 플러시보 효과(Placebo Effect)다. 절망의 늪에서도 구원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손은 바로 희망이다. 아직은 진짜 약을 주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점령한듯해 보이지만 그런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는 스스로를 죽인다.

달처럼 높이 날아 오른 바보새는 그 위용만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월인천강(月印千江). 밝은 달 하나가 누리의 온 강에 비추고, 강물은 스스로 달이 되어 하늘로 오른다는 선인들의 노래는 탁월하다. 그 가르침은 불언(不言)이다. 말 없음이다. 무서워서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을 움직여 천지를 바꾸고, 총칼을 쓰지 않고 악을 이기는 참 말이다. 바보새처럼 사는 사람들이 결국 이 땅을 바로세울 것이다. 온갖 사행과 거짓으로 포장을 해도 그 알맹이는 결국 까발려지고 만다. 포장은 결국 벗겨내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 껍질을 부둥켜안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쓸수록, 껍질을 벗기려는 손에 힘이 더해지기 마련이다.

겨울비가 점점 거세진다. 매화나무는 빗속에서 도드라진 겨울눈을 매달고 있다. 동지가 지났으니 이제 봄이 멀지 않았다고 속삭인다. 매끈한 새 가지에 달린 매화의 붉은 겨울눈이 화사하다. 한순간 겨울을 박차고 흐드러지게 피어날 매화꽃 향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바보새처럼 날아올라 세상을 내려다 볼 사람들이 주인 되는 날이 기다려진다. 아직 겨울이지만, 세상은 봄을 잉태하고 있다. 말없이 겨울비를 견디는 숲이 장하다.

소한(小寒)에 찾아 뵐 어머니의 산소에도 비가 내리겠다. 나비가 되에 봄볕을 한껏 누리실 당신의 무덤가에도 바보새처럼 참꽃 가득 피어오르기를 기대한다.


▲바보새는 멀리 날아간다. 사진출처=antarcticguide.com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