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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풍(朔風) 속에서 익어가는 봄

[홍순천의 ‘땅 다지기’(17)]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7-01-25 22: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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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시베리아에서 불어 온 바람에 연일 추위가 몰려온다. 삭풍과 더불어 온 눈은 창밖 풍경을 바꿔놓았다. 복숭아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이 바람에 날리고 아침이면 눈밭을 홀로 걸었을 길고양이의 흔적만 마당에 남아있다. 해가 나기를 기다려 음식찌꺼기를 나무 밑에 버리자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던 까치 가족이 날아들었다. 늘 오는 자리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는 까치를 길고양이가 덮쳤다. 복숭아나무 위에까지 뛰어 오른 고양이는 사냥에 실패했다. 날개 가진 짐승을 어찌 당하랴? 게다가 영악한 까치를 말이다. 까치 까치~ 설날이 다가왔다.

음력 1월 1일은 우리민족의 큰 명절인 설날이다. 오래 전부터 고향으로 가는 차편을 예약하고 부모와 가족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중국의 춘절처럼 우리도 원래는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봄맞이 축제를 즐겼지만 요즘은 많이 간소해졌다. 낯설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출발하는 설날에는 떡국을 끓여 먹으며 덕담을 나누는 가족들이 있어서 좋다. 설날은 사랑을 나누어 세상을 밝히는 회향(廻向)의 시간이다. 회향을 위해 몸과 마음을 사려 조심해야 할 일도 많았다.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 해서 밤을 샜다. 해지킴이다. 열과 성을 다해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다.

야광귀(夜光鬼)를 속이기 위해 아이들은 신발을 감춰두고 채를 걸어두기도 했다. 야광귀는 설 전날 밤 집에 와서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린다. 그 신의 주인에게는 그해에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신발을 감추는 대신 채를 마루 벽에 걸거나 장대에 걸어 뜰에 두었다. 야광귀는 신기한 물건에 나있는 수없이 많은 구멍을 세느라 밤을 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는 것이다. 복조리를 나누기도 하고 묵은세배를 하며 이웃을 살피는 상생의 시간이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던 시절, 어머니는 일년 내내 세찬계(歲饌契)를 들었다가 설이 다가오면 푸줏간에서 고기 한칼을 끊어 오셨다. 심부름은 물론 막내인 내 몫이었다. 살뜰하게 나누고 조리해서 상에 오른 고깃국은 일 년에 몇 번 맛보기 힘든 별미였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가 더욱 그립다. 며칠 전에는 가까운 친구를 잃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일렁이던 파도(친구 이름)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에서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향하던 길에 동해안 바닷가를 지났다. 해변에는 너울성 파도가 일렁이다가 거품이 되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카루소'가 바닷가를 지나는 내내 가슴속으로 지나가 먹먹했다. 아름다웠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느끼는 회한이 관통하는 카루소는 비장하지만 아름다운 곡이다.

설이 지나면 정유년(丁酉年), 붉은 닭의 해다. 닭이 울면 동이 트고 세상에 어둠이 물러간다. 예로부터 닭은 어둠과 귀신,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상징적인 동물이었다. 닭 피에도 영묘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돌림병이 돌면 닭의 피를 대문이나 벽에 발라두면 역병을 피 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시간의 온갖 부조리와 서러움, 아픈 이별이 올해에는 모두 사라지기를 기대해 본다. 설날 떡국을 나누며 주는 덕담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답답하고 한심하고 괘씸한 야광귀들이 모두 쫓겨나 세상이 공명정대하고 밝아지기를, 제발 빌어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누는 인사에 정결하고 진실한 마음만 담기기를 기대해 본다.

시베리아를 거쳐 온 바람이 몹시 차다. 삭풍에는 우랄 알타이의 노래가 섞여있는 듯하다. 시베리아에서 자란 잣나무로 만든 악기 '똡슈르'는 현이 두 개다. 말꼬리로 만든 두 개의 현이 내는 소리는 단조롭지만 깊은 울림이 있다. 엄동설한을 견디는 잣나무의 속 깊은 울림 같은 카이(우랄의 민속음악)는 봄이 멀지 않았다고 속삭인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처음으로 돌아가 온전하게 다시 시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빈다.


▲겨울눈은 봄을 품고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