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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세상

[홍순천의 ‘땅 다지기’(19)] 홍순천(진안 봉곡마을)


... 편집부 (2017-02-22 16: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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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홍순천)

찬 서리가 마당에서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 깜깜한 그믐밤을 틈타 별들만 총총한 하늘을 유유히 지나가는 인공위성의 궤적이 여유롭다. 세상은 잠들지 않았지만 잠에 취한 사람들은 아직 새벽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려운 시간이다. 공기는 차지만 새벽을 견딜만하니 곧 아침 해가 떠오르겠다.

친구 딸의 결혼식에 부름을 받고 고향에 갔다. 모처럼 만난 친구들은 흰머리를 날리며 부쩍 건강에 신경을 쓰는 품세다. 검은 머리도 대개는 염색을 했다는 고백이다. 새벽등산을 마친 친구가 도봉산 입구에서 산 고로쇠물을 주섬주섬 꺼냈다. 한 잔씩 나누어 마신 달짝지근한 물은 건강을 나누는 친구의 배려였다. 경칩(驚蟄) 무렵에는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수액(樹液)을 마시는 풍속이 있다.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고뢰쇠나무가 길어 올리는 물을 빼앗은 것이다. 이 물을 마시면 몸에 병이 생기지 않고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뼈아픈 데 약이 된다고 골리수(骨利樹)라고도 부른다. 보통 3일 동안 한 말 정도를 마셔야 효험을 볼 수 있다고 하니 무병장수를 바라는 사람들 때문에 고로쇠나무는 등골이 휘겠다.
이맘때 조상들은 선농제(先農祭)를 지내기도 했다. 농업의 신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유교를 기반으로 농업을 장려하던 시대의 행사다. 신농은 중국 고대 왕조를 이끈 전설의 세 황제 중 두 번째다. 그는 하루 100여 가지 약초를 맛보고 효능을 정리했다. 신농은 숱한 독초를 먹고 중독되어 몸의 형태가 변할 정도였지만, 병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정리한 약의 성질과 효능이 훗날 한의학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고로쇠나무가 물을 길어 올리는 동안 겨우내 숨어있던 개구리들은 계곡으로 모여든다.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 시기다. 올해는 봄에 몰려온 강추위에 그들의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이제 곧 장하고 끈질긴 개구리들의 합창이 들려올 시기다. 겨울 내내 잠들어 있을 것 같던 세상은 사실 잠자고 있지 않았다. 생명을 끈질기게 보듬어 안고 다음세대에게 전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취하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연은 자기 몸을 기꺼이 내 주기도 한다. 넘치지 않게 취하고 균형을 이루는 겸손한 생존전략이다. 하지만 지금 아프리카 북동부에서는 200만 이상의 난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비만과 전쟁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의 폭력과 부당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야만의 결과다. 헛똑똑이들의 자기기만이 만들어낸 모순이다.
밤을 온통 밝히는 보름달이 뜰 때면 별들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감추는 듯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보지 못할 뿐이다. 별빛은 수 천, 수 억 년을 달려와 눈앞에 나타나지만 그 아름다움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별빛은 수 억 년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지구별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늘 깨어있는 시간과 공간이 혼재되어 삶의 근간을 지탱하고 있지만 어리석은 이의 눈에는 잠들어 있는 무기물로만 보인다. 세상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날 선 검처럼 긴장된 의식이 늘 세상을 지켜보며 깨어있다. 헛똑똑이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 바로 잠들지 않는 세상의 생령들이다.

신농씨 덕에 고로쇠물을 마시는 절기다. 개구리들이 합창을 하는 논바닥에서 새벽부터 농사를 준비하는 마을사람들의 경운기 소리가 아직 들리지는 않지만, 참꽃 복사꽃 흐드러지는 호시절이 멀지 않았다. 잠든 척 기다려온 봄맞이에 마음이 바쁘다. 지긋지긋한 겨울왕국이 끝날 날도 이젠 멀지 않았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잘 살아라. 품에 안고 다독이는 자식들처럼, 소중한 눈으로 잠들지 않는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이 고맙다.


▲버려둔 감자도 봄을 품고있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