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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4 21:47:42

[안중만 연재] 교육, 학교 울타리를 넘다 1 - 교사가 되다


... 편집부 (2024-03-23 10:3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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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되다

나를 멍들게 했던 학교

학교란 어떤 곳인가? 나에게 학교는 아픔과 상처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의 어려움으로 인해 수업시간에 필요한 기본적인 학용품마저 준비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도화지나 물감, 찰흙과 같은 준비물을 가져가야 하는 미술 시간이 가장 고달팠다. 힘들게 고생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님의 고달픈 노동을 잘 알기에 챙겨가야 할 준비물이 있어도 쉽게 말씀드리지 못했다. 준비물 없이 등교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선생님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지만 담임 선생님께 혼나는 게 차라리 마음이 더 편할 정도였다. 가정형편이 정말 어려울 때는 점심 도시락을 못 챙겨가 수돗물로 점심을 해결해야 했던 적도 있었으니…. 이 밖에도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에 참여하지 못했던 중학교 시절의 아픔, 음악수업 실기평가에 필요했던 기타를 못 사 복도에 무릎이 꿇린 채 선생님의 비난을 들어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상처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살아온 지 어느새 22년을 넘기고 있다. 학창 시절 내가 받은 학교로부터의 아픔과 상처를 적어도 내가 만나는 학생들에게 주지 않아야겠다는 각오와 다짐으로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당시 00선생님은 기타를 사지 못한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그 이유를 물으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에게는 술값과 담배값만 아껴도 자식들 기타를 사줄 수 있는 게 아니냐며 나와 친구들의 부모님을 싸잡아 비난하셨다.)

공교육을 받는 12년 동안 여러 선생님을 만났다. 분명 학생 교육에 열정을 품고 최선을 다하신 선생님도 계셨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에게 선생님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공부를 잘하거나 가정형편이 부유한 아이들에게만 향했던 끝없는 편애, 반대로 공부를 못하거나 가난한 집 아이들을 향한 게으름, 불성실의 낙인과 편견은 새롭게 무언가를 해보려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송두리째 빼앗아가기에 충분했다.



교사가 안 되었다면 지금쯤 나는….

학교에 열심히 다닐수록 학교로 인한 상처가 깊어진다면 누군들 학교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유독 학교에 대한 부정적 기억과 아픔이 많았던 나였기에 만약 지금처럼 교사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면 누구보다도 학교와 교사를 힘들게 했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사회 저변에 깔린 공교육에 대한 냉소는 국민이나 학부모 각자가 학창 시절 학교나 교사에게 겪었던 부정적 경험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공교육 위기의 원인으로 학교나 교사가 지목되는 현실에 당사자들의 억울한 마음도 크겠지만….

지금도 학교는 여러 이유로 충분하게 아프다. 하마터면 그 아픔을 더 크게 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었는데 학교를 위로할 수 있는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학교를 더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과 모두를 위해 시급하게 필요한 사회적 실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꿈꾸던 학교는

삶을 대하는 성실한 자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귀한 자산이다. 덕분에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결석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체격이 작았기에 체력만큼은 친구들에게 뒤지기 싫어 모든 운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체육대회나 각종 체육행사에 학급 대표로 선발될 정도의 운동 능력은 갖추었다. 보통의 친구들처럼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였기에 특별나게 잘하는 것이 없었던 나였지만 책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컸던 것 같다. 우연히 읽게 된 ‘명탐정 셜록 홈즈’라는 책을 계기로 책 읽기에 재미를 갖게 되었다.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다양한 세상은 가정형편의 어려움과 결핍으로 제한되었던 경험의 한계를 극복해 주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바람꽃’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여러 학교의 친구 및 선‧후배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책으로 독서와 독후활동을 할 수 있었다. ‘데미안’과 같은 고전을 비롯해 다양한 문학작품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문화적 감수성과 사회 참여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연합써클(동아리)이었던 ‘바람꽃’ 활동은 이후 내 삶의 방향성을 찾아가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내 꿈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였다. 망치와 펜치, 테이프 등 각종 연장이 들어 있는 벨트를 허리에 둘러맨 건설노동자의 모습이 마치 서부영화에서 화려하게 총질하는 총잡이처럼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데미안’이라는 책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심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회과학 서적을 읽어가면서는 역사에 대한 흥미가 커져 역사학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고등학교 국사 선생님이 해 주셨던 “우리나라 역사의 80% 이상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왜곡 되었다”는 말씀에 역사학자의 꿈을 접게 되었다. 역사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거짓된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 역사학자에 대한 어떤 매력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접하면서부터는 운동가로서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삶’ 보다는 ‘사회적 삶’에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두고 싶었다. ‘분단된 조국의 아픔과 소외된 노동으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 민중들을 위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학 입시를 위한 준비에 사력을 다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내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취업해 노동 현장에서 노동운동가로 살아가는 삶은 어떨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무렵 입시가 눈앞에 다가왔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길어지고 깊어지다 보니 학교공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성적은 떨어졌고, 대학에 진학한다 해도 원하는 과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성적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중에 현직에 초등학교 교사로 계시는 친척 분의 권유로 교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쉼을 준다는 의미(솔직히 일단 대학에 소속을 두고 재수해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려 함)를 두고 교대(전주교육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교육대학교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목적형 대학교이고, 학생의 대부분이 여학생이라서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던 나에게 교육대학교 학생으로서의 삶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휴학 또는 자퇴를 하려 했었다. 그런데 계획 실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보니 어느새 ‘교육’과 ‘교사’의 중요함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러다가 교육운동가로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지금 돌아보면 대학 생활 4년은 초등학교 학교 현장에 대한 이해와 준비보다는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가로 치열하게 살았던 삶이었던 것 같다. 학생회 활동을 하다보니 총학생회장이 되기도 했었고, 그 여파로 제적의 위기도 여러 번 겪었다. 학생운동을 했던 결과로 다른 동기들(91학번)에 비해 3~4년 늦게서야 현장 교사로 서게 되었지만 젊은 시절 뜨겁게 살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립고 자랑스럽다. 대학 시절 비록 학과 공부는 열심히 못했지만 현장에서 더 많은 아이들을 품고 이해할 수 있는 거시적 차원의 공부는 충분히 한 것 같다.

그 시절 경험과 기억은 지금 내가 교육 현장에서 교육운동가로 살아갈 힘과 안목을 갖게 해주었고, 가끔 지쳐 쓰러질 때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주는 회복의 원천이 되어준다.

예비교사 시절 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지라도 내가 일관되게 꿈꾸던 학교는 배움이 즐겁고 가르침이 행복한 학교였다.

전교생 14명, 분교에서 시작된 교사생활

여러 번 임용시험에 떨어져야 했던 아픔을 이겨내고 드디어 교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1999년 9월 1일부터 ‘김제 만경초등학교 장흥분교’에서 시작된 초등교사로서의 삶은 3개 지역 (김제시, 전주시, 진안군) 7개교 (김제 만경초 장흥분교, 만경초, 전주신동초, 전주동신초, 전주북초, 마령초, 백운초)를 거쳐 22년째 이어지고 있다.

첫 발령지인 ‘김제 만경초등학교 장흥분교’는 전교생이 14명인 작아도 너무 작은 초미니 학교였다. 한 개의 교실에서 두 개의 학년(3학년과 4학년) 7명을 가르치는 복식학급 담임으로서 나의 교사 생활은 시작되었다. 신규교사였던 나에게 두 개의 학년을 동시에 가르쳐야 하는 복식학급 담임은 개인적 능력의 유무를 떠나 커다란 구조의 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분교이다 보니 행정업무가 없고 아이들과 수업과 교육과정으로만 온전히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아주 컸다. 폐교로 인하여 분교에서의 생활을 4개월로 끝을 맺어야 했지만 그 당시 아이들과 했던 여러 가지 활동과 경험은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야산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밧줄을 걸고 타잔 놀이를 했던 기억, 김제평야 만경 들판에 나가 까마귀 떼를 쫓던 경험, 만경강에 나가 망둥어 낚시를 했던 추억, 추운 겨울 교실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그 주전자에 라면을 끓여 먹었던 사건 등등 교과서 수업만으로는 만날 수 없었던 소중한 경험을 삶이라는 교육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교사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을 일찍이도 누렸던 것 같다.

수업하는 교사, 살아내야 했던 학교

분교에서 행복했던 4개월의 생활을 뒤로하고 시작된 본교에서의 생활은 교사로서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도록 했다. 분교에서의 생활은 아이들 만나기 위해 수업과 교육과정을 디자인하는 고민이 주였다면 본교에서의 생활은 잡무라 불리는 각종 업무에 온 신경이 갔다. 솔직히 학급에서 내가 아이들과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주어진 업무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거나 각종 취합 자료를 제때 제출하지 못하면 무능력한 교사로 낙인찍히는 교직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 공문과 잡무에 마음과 영혼을 빼앗기곤 했다. 교사의 가슴과 머리에는 아이와 수업이 아니라 각종 공문과 잡무가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혁신학교를 필두로 한 학교혁신 운동이 없었다면 지금도 교사의 곁에 아이가 아닌 잡무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학교와 교사는 가르치는 일보다 처리해야 하는 각종 행정업무가 산더미처럼 많아 ‘교육이 가능한 학교’를 만들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상황이다. 오죽했으면 “짬을 내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짬을 내서 수업을 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공감을 얻을까 싶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수업하는 교사가 존중받고, 살아내는 학교가 아닌 살고 싶은 학교가 될 수 있을지…. 그래도 꿈을 계속 꾸는 게 맞겠지?

학교 탈출을 갈망하다.

분교를 포함해 본교에서의 생활까지 시골 작은 학교에서의 6개월여 시간을 보내고, 전주 대도시 학교로 근무처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 인사기준에 폐교학교 교원에 대한 우대조항이 있어서 시골 학교 근무 6개월 만에 전주로 학교를 옮길 수 있었다.

전주에서 새롭게 발령을 받은 학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내에 새롭게 개교를 하는 큰 학교**였다. 당시 학급수가 40학급을 넘었으니…. 새롭게 개교하는 학교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교원의 70% 이상이 교직경력 1~3년 미만의 저경력 교사였다. 신설 학교라 가뜩이나 일이 많은데 경험이 적은 교사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니 당시의 혼란과 어려움이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2000년 3월 1일 자로 개교한 전주신동초등학교)

도시 큰 학교에서는 시골 작은 학교에 비해 담당해야 할 업무의 수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학생 수와 학급 수가 많다 보니 업무에 대한 부담감은 더 컸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이 담당하는 업무에 대한 협조(각종 취합 자료를 제때 제출하는 일)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었다. 정말 커다란 학교가 업무를 중심으로 톱니바퀴처럼 착착 돌아간다는 느낌이었기에 조그마한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이 컸다.

교사가 된 지 날수로 1년도 채 안 된 햇병아리 교사는 교사의 정체성을 업무에서 찾아가며 아이들 곁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당시 맡게 된 주된 업무가 정보였었는데 학교에 출근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정도였다. 내가 컴퓨터 업체의 서비스 기사인지, 아니면 수업하는 교사인지 모를 정도로…. 신설 학교여서 전출입 업무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주마다 서버실에서 교무학사에 관련된 데이터를 다트 테이프에 백업하는 일을 해야 하는 관계로 청소 시간 조차 아이들 임장 지도를 할 수 없었다.

그때 발생한 안전사고로 당시 도의원에게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면 예나 지금이나 교사의 목숨이 파리목숨 같다는 생각이다. 학교 현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다양한 어려움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그 어려움을 교사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신설 학교에서 2년간 근무를 했는데 업무에 대한 부담감뿐만 아니라 여러 건의 학생안전 사고로 인해 교직 생활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어쨌든 신설 학교를 뒤로 하고 전주 시내 2개의 학교에서 8년을 보냈다. 한 학교에서 5년 만기를 채웠고 다른 학교에서는 3년을 더 생활할 수 있었다. 지금도 전주시는 지역만기라는 인사제도가 적용되고 있어서 전주에서 10년을 재직하면 다른 지역(타시군)으로 학교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근데 내 안에서는 자그마한 욕망이 계속 솟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를 탈출하는 것이었다.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열망했건만 실제 현장은 내가 꿈꿔왔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도 아이들과의 생활이 즐겁지 않아졌다. 아이들을 대하는 내 모습을 되돌아보면 되돌아볼수록 더 이상의 교사 생활은 의미를 넘어 커다란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선택, 도시를 떠나 다시 시골 학교로!

전주에서 근무할 수 있는 날의 만기가 가까워질수록 학교를 벗어나고픈 마음은 더욱 강렬해졌다. 마음의 바람을 현실로 만들고자 학교를 떠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으나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마음이 콩밭에 있다 보니 학교와 아이들에게 집중하기가 더 어려웠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깊어질수록 아내와 상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초등현장에서 함께 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아내와 고민을 나누었고, 우리 부부가 내린 결론은 시골 학교에서 다시 시작해보자는 것이었다. 만약 시골 학교에서도 앞서 고민한 내용을 해결할 수 없다면 그때는 과감히 학교를 정리하기로…. 진안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렇게 내딛어졌다.

[안중만 연재] 마령을 만나다, 마령을 만들다 2 - 학교와 나 [ 다음 내용 보기 ]



안중만 소개


1971년 전주에서 태어나 금평초, 전주서중, 동암고, 전주교육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

1999년 9월 1일, 김제 만경초 장흥분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전주신동초, 전주동신초, 전주북초를 거쳐 2010년 마령초등학교에 이르렀다.

2012년부터 전북형 혁신학교 운동을 진행하며 학교혁신의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마령초등학교의 다양한 학교혁신 사례를 전북교육청 직속기관(전북교육연수원, 지역청, 학교 등), 제주, 세종, 충북, 울산교육청 연수를 통해 전국적으로 소개해왔다.

그동안 전주교육대학교에서 ‘교사론’ ‘교직실무’ ‘특별재량활동의 이해’에 대해 강의했다. 전라북도교육청에서 예산 TF 위원과 주민참여예산제 위원(2011~2017)으로 품앗이를 했고, 현재는 청소년정책위원회 위원, 혁신학교운영위원회 위원, 학교자치활성화 지원단 위원으로 역할하고 있다.

전교조 전북지부에서 부지부장, 참교육실장, 전주초등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전교조 진안지회 지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농림축산식품부 주관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진안군 마령면 추진위원(2015~2021)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전히 아이들이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생태시민으로 자라가도록 교육과정의 생태적 전환에 힘쓰고 있다. 학교와 마을, 지역이 더불어 행복한 마을교육공동체 구축 운영에도 애쓰고 있다.